Learning Agility
십 년 넘게 들었지만, 여전히 들을 때마다 거부감이 드는 표현은 사람이 제품도 아닌데, ‘스펙’이란 단어로 설명하는 거다. 대기업이 스펙을 보는 나름의 타당한 근거는 크게 2가지인데, 바로 ‘성실성’과 ‘학습력’이다. 다수가 인정하는 유명 대학을 갔다는 것은 특정 시점(흔히 청소년 시절)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중고등학교 때 하고 싶은 게 너무도 많은데, 부모나 학교나 획일적으로 대학을 가라고 한다. 그 권위에 순종하면서, 학생의 기본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는 것은 매일 출근하여(또는 원격근무 하면서) 8시간 근로시간을 준수하고, 딴 짓 안하고,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묵묵히 해야 하는 인재상에 부합한다.
또 한가지 학습력 측면에서, 주입식 교육을 열심히 받아서 높은 학업 성취도를 이뤘다는 것은 주어진 기업 교육과 선배들의 가르침에 일정 수준까지 따라올 수 있다는 방증이 된다. ‘독학’과 ‘스스로 깨우침’도 중요하지만, 선배들의 일정한 역할이 인정되고, 기업의 철학이 존중되는 교육을 통해 회사의 문화에 맞는 인재를 길러내는 게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정규 교육을 충실히 수행하며 따라갔던 ‘Learning Ability’, 바로 학습력이다. 그러니 스펙을 따진다고 거대 기업들을 비판만 할 수도 없다. 다만, 스타트업마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미 시작부터 거대 기업과의 ‘인재 전쟁’에서 진 게임이 된다는 거다.
스타트업은 비슷한 듯 다른 접근이 필요한데 학창 시절엔 게임에 열중했든 연애에 열중했든 후광을 일으키는 스펙 쌓기는 실패했지만, 유니크한 Learning Agility 가 필요하다. 왜냐면, 스타트업은 HRD 기능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경영진 역시 구성원들에게 외부 교육도 보내주고, 대학원 학비도 보태 주고 싶다. 그렇지만 자원의 우선 순위 배정에서 기업 교육은 늘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그 흔한 업무 관련 서적도, 인터넷 강의도 시원하게 지원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스타트업이야말로 ‘자기주도학습’ 이 가능한 멤버들이 절실하다. 정자세로 책 읽고 마스터에게 교육받지 않아도, 일하면서 귀동냥으로 듣고 좌충우돌하면서 역량이 일취월장하는 멤버들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필자는 연애도, 주식도 책으로 공부했고, 현재의 스타트업 입사 후 게이미피케이션을 이해하기 위한 게임과 개발 업무마저도 관련 서적을 읽고 동영상 강의,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학습을 하는 데 이런 스타일의 더딘 학습 방식은 지진아 필자 하나로 충분하다. 대화와 실무, 독학으로 여러 영역의 본질을 넘나드는 인재들을 보고 있노라면, 일렬로 나래비한 대학 진학을 강요함으로 청소년들의 Learning Agility를 가두는 게 미래 인재 육성에는 상극으로 느껴진다.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야...” 《차이를 만드는 조직》이란 책의 마지막 문장은 영화 <스타워즈>의 제다이 마스터 요다의 대사다.
차이를 만드는 조직의 시작은 ‘서바이벌에 대한 절박함과 새로운 문제해결 방법을 도전하겠다는 결기’이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임금 격차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대기업의 쩐(錢)의 전쟁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잣대를 뛰어 넘어 스타트업을 다니며 자잘한 재미와 위대한 미션을 발견하는 사람들에게 절로 리스펙트가 생긴다.
얼마 전 우리 회사는 연봉 100만원 차이로 입사를 고민하는 인재를 두고 내부적인 갑론을박이 있었다. 100만원에 인재를 놓치는 건 소탐대실이라는 주장도, 100만원에 선택을 정정하는 인재는 미션 오리엔티드 인재를 뽑는 원칙과 정면으로 대치된다는 의견도 모두 일리가 있다. 다만, 스타트업의 아름다운 이상과 발목을 붙잡는 차가운 현실 사이의 간극이 멀 뿐이다.
부모님과 친척들이 모르는 스타트업에 다니는 게 걱정을 일으킬 까봐 명절 때 새 명함을 꺼내지 못하고 만지작거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인재를 구인하지 못해, 더 이상 헤드헌터가 아닌 스타트업 스카우터인 필자에게 하소연을 하는 스타트업 대표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스타트업 일자리는 많고, 스타트업에 오고 싶은 인재도 많다. 분명 대기업 HR 은 부럽고 멋진 포지션에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스타트업은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기에 그 HR을 따라하면 망한다. 미지의 스타트업 HR 선택지에 모범답안은 아무도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은 대기업의 축소판이 아니다” _(린스타트업 아버지 스티브 블랭크 교수 -Steve Blank)
▶ <스타트업 HR을 말하다> 시리즈 보러 가기글ㅣ정돈희 호두랩스 People&Culture Team Head이 글을 쓰신 정돈희 님은 대기업에서 사업부문과 인사 및 조직문화를 경험하고, 헤드헌터 및 인사 컨설팅 활약 후 스타트업 창업을 준비하다 에듀테크 호두랩스에 합류하여 엄마 역할, 코디네이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