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능력이 ‘마케터’에게만 필요한 역량일까?

글쓰기 능력이 ‘마케터’에게만 필요한 역량일까?

일자

상시
유형
아티클
태그
이 아티클은 <나의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 시리즈 1화입니다.


토요일 오후 2시. 직장인 글쓰기 모임이 시작되기 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쁘게 물든 가을 단풍에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또, 업무에 지쳐 주말이면 늦잠 자고 싶을 텐데… 여러 유혹을 물리치고 홍대까지 몇 명이나 올 것인지에 대해 걱정이 앞섰다.

필자는 직장인 대상으로 글쓰기 모임을 이끌고 있다. 낮에는 마케터로, 밤에는 작가로 글을 쓴다. 본캐(본래의 캐릭터)는 회사원이기에 주말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렇기에 더욱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하나둘씩 노트북을 들고 강의실로 입장했다. 글을 쓰겠다는 직장인 열세 명이 한뜻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부끄러운듯 첫인사를 나눈 후, 노트북을 펼쳐 들고 글을 쓰는 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 셔터스톡


"왜 글쓰기 모임에 오셨어요?"

2020년부터 성인 대상으로 글쓰기 모임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CEO, 프리랜서, 취업 준비생 등 다양한 분을 만났다. 그러나 대다수는 회사를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들이다. 그들의 대답은 거의 비슷하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요"
"회사에서 글을 쓰는 일이 많아서 글을 더 잘 쓰고 싶어요"
"마케터인데 카피라이팅을 잘하고 싶어요"

필자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2008년에는 글을 쓴다고 하면 대부분 골방에 틀어박혀 예술을 하는 전업 작가를 떠올렸다. 글을 쓰면 굶어 죽는다는 말이 한 세트처럼 묶여 있었고, 글을 쓰는 일은 작가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서점에 가면 직장인을 타깃으로 한 글쓰기 책이 매대에 수두룩하고, 직장인을 위한 글쓰기 강의와 유튜브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다. 단순히 글쓰기 방법을 배우는 것을 넘어, 직장인들끼리 모여 같이 글을 쓰고 네트워킹을 하기도 한다. 10년 사이 글쓰기는 확실히 직장인에게 꼭 필요한 무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직장인에게 글쓰기가 왜 중요할까?


1. 회사 생활의 90%는 글쓰기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글로 시작된다
필자는 PR과 마케팅 직무로 일해왔다. 보도자료를 쓰고, SNS 콘텐츠를 만들고, 고객 대상 이메일을 쓰는 등 다른 직무보다 글을 쓰는 일이 많아 글쓰기는 필수였다. 보도자료는 정보의 오류나 오타가 절대 없어야 하며 회사에서 알리고자 하는 핵심만 간추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쓰기가 까다로운 글이다. 반면, SNS 콘텐츠는 빠르게 전환되는 고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강력한 카피를 만들어내야 하고, 고객 대상 이메일은 무조건 클릭할 수밖에 없는 제목으로, 하단의 CTA(Call To Action) 버튼까지 스크롤을 내려 버튼을 클릭하게 할 만큼 매력적으로 글을 작성해야 한다.

이런 글쓰기 능력이 ‘마케터’에게만 필요한 역량일까? 회사에서 이메일이나 기획서, 그리고 보고서를 쓰지 않는 사람은 없다. 특히 재택근무로 인해 메신저로 소통하는 일이 많아진 요즘, 글쓰기가 회사 생활의 9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번은 인턴사원이 외부 관계자에게 보낸 이메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저히 무슨 의도로 메일을 보내는 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무엇을 요청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메일이었다. 이메일을 보내는 목적과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점을 이끌어내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하고, 전하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으면 넘버링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후 이메일은 '읽는 사람을 위한 글'로 변화했다.

사실 필자의 커리어는 출판 편집자로 시작되었다. 홍보 담당자로 커리어를 전환할 때 관련 경력이 없어 이직이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필자를 알아봐 주고 채용해 주신 대표님이 계셨다. "왜 저를 뽑으셨어요?"라고 여쭤보자 대표님은 "글을 잘 쓰면 다른 것도 잘하실 것 같아서요"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한다면, 글을 잘 쓴다는 건 딴 길로 새지 않는 능력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글이 조금만 길어지면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분명히 그 목적과 의도를 정해 놓고는 이 일 저 일이 겹쳐 진행되면서 배가 산으로 가다 뒤집혀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일의 목표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는 것은 좋은 글을 쓰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외에도 글을 잘 쓴다는 건 일을 잘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일을 잘하고 싶은 욕심을 가진 직장인이라면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2. 잃어버린 감정, 글 쓰면서 돌아보기



솔직한 내 감정을 돌아볼 시간
출근길 지하철 안 사람들의 표정을 가만히 관찰하곤 한다. 어제의 과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회색빛 얼굴과 무채색의 표정으로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가끔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창문에 비친 필자의 얼굴도 그들과 똑같다는 것이다.

ⓒ 셔터스톡


"수진 님, 인공지능이에요?"

얼마 전 회사 동료가 장난처럼 물었다. 아무 표정 없이 걸어 다니는 모습이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말에 뜨끔했던 이유는 실제로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감정 표현에 둔감해진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수를 만들지 않기 위해 항상 긴장해야 하고, 어느 정도 일을 쳐낼 줄 아는 뻔뻔함도 있어야 하고, 때로는 잔말 말고 '예스'를 외쳐야 하는 예스맨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 사회생활을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무리 화가 나도 꾹 참고 화장실에서 몰래 눈물을 터뜨리곤 했다.

그래서 집에 오면 글을 썼다. 소위 데스노트(death note) 쓰듯 누군가를 욕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쓰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 가장 중요한 건 내 감정을 들여다 봐주는 것이다. 써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어떤 점에서 화가 났고, 반대로 잘못한 점은 무엇이 있으며, 내가 어떤 것을 참을 수 있고 참을 수 없는 사람인지를 글을 쓰다 보면 알게 된다.

글쓰기 모임에 오신 직장인 분들이 약 30분간 아무 말 없이 타닥타닥 타자기 소리만 내며 에세이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평일에 저분들은 어떤 모습일까. 노트북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 아마도 글쓰기 모임에서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일반인은 잘 알지 못하는 전문 용어가 가득한 보고서를 쓰고 계실지도 모른다. 월, 화, 수, 목, 금, 5일 동안에 표출하지 못한 감정을 주말 이틀을 이용해 마음껏 펼쳐내는 표정에는 각자의 색깔이 번진다.


3. 진짜 나를 알게 되다



에세이를 통해 느끼는 행복
글쓰기 모임이 끝나도 ‘혼자 글을 쓸 수 있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모임의 목표다. 글쓰기 모임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글을 쓰고 피드백을 나누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혼자서 쓸 줄 알아야 한다. 필자도 종종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강의도 하지만, 글은 언제나 혼자 쓴다. 친구와 같이 각자 할 일을 하러 카페에 가도 누가 옆에 있으면 글쓰기에 집중이 잘 안된다. 글은 온전히 혼자만의 생각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회사에 출근하면 최소 30분에 한 번씩은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이메일이나 메신저가 날아오기도 하고, 옆 동료가 말을 걸기도 하고, 줄줄이 미팅이 이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퇴근 시간 이후나 주말에도 업무 관련 연락이 온다. 그렇게 쉴 새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나면 혼자 2배의 시간을 일한 것보다 더 큰 피곤함을 느낀다. 고객과 직접 대면하는 서비스직을 맡고 있는 직장인들의 피로도는 더욱 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증권 회사에서 상담 업무를 하고 있는 한 지인은 휴가를 내고 혼자 미술관에 가거나 책을 읽는 일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들에게 쏟아낸 에너지만큼 혼자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 셔터스톡


에세이 쓰기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직장인에게 매우 좋은 활동이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고, 상사나 고객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을 주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잘 쓰든 못 쓰든 상관없다. '에세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일기'도 좋다. 단 10분이라도, 단 한 줄이라도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자기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는 직장인이 많아질수록 행복을 느끼는 직장인이 많아지리라 믿는다. 나코시 야스후미 작가는 그의 책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에서 '내 마음속 공허감은 절대 다른 사람이 채워주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직장인의 공허감도 혼자 생각하고, 혼자 걷고, 혼자 글을 쓰는 시간 동안 채워진다.



▶ <나의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 시리즈 보러 가기 



글ㅣ유수진
낮에는 마케터로 일하고, 밤에는 작가로 글을 씁니다. 다양한 공기업에 칼럼을 기고하며, <폴인>, <원티드>에서 객원 에디터로 활동 중입니다. 오프라인 커뮤니티 <문토>에서 글쓰기 모임 리더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채널에서 쓰는 것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edit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