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회사도 살리는 공감의 핵심!

죽어가는 회사도 살리는 공감의 핵심!

일자

상시
유형
아티클
태그
이 아티클은 <조직의 쓴맛> 시리즈의 2화입니다.


기업을 살리는 공감: 마이크로소프트의 부활


2018년 겨울, 마이크로소프트(MS)는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으로 올라섬과 동시에 제2의 전성기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물론 애플, 아마존에 1위를 다시 빼앗기기도 하는 등 엎치락뒤치락 하지만 시장 전문가들은 추락을 거듭하던 마이크로소프트가 매우 강력하고 주목할 만한 글로벌 최상위 기업의 면모를 되찾았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사실 마이크로소프트는 그전까지 미국 시장에서 한물간 기업으로 통했다. 90년대 ‘윈도우Window’를 앞세워 시장을 군림했지만 스마트폰의 출현과 함께 PC시장이 무너지면서 오랜 침체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윈도우 역시 품질 문제로 계속 시장의 도전을 받았다. 2014년 2월, MS의 세 번째 최고경영자로 임명된 사티아 나델라Satya Narayana Nadella는 취임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 셔터스톡 


“회사는 병이 들었다.
직원들은 피로감과 불만을 느꼈고, 경쟁에서 뒤처지는 상황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회사의 불필요한 내부 경쟁, 그에 따른 피폐한 관료주의의 문화가 시장이 요구하는 빠른 변화와 혁신을 막고 있었다. 그랬던 MS가 불과 수년 만에 환골탈태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훗날 미디어 인터뷰에서 사티아 나델라는 이를 ‘공감의 기업 문화’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MS가 보신주의, 관료주의를 깨고 시장(고객)에 대한 ‘공감’과 ‘협력’의 문화를 구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아마존 등과 같은 경쟁사에 밀려 늦었다고 판단한 ‘클라우드’ 시장에 MS가 진출해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시장 고객에 귀를 기울였고, 그 공감을 바탕으로 MS만이 할 수 있는 기술과 비즈니스 전략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직 구성원 스스로 답을 구하고 찾았기 때문이었다. 공감은 신뢰를 부른다. 그리고 역사상 신뢰는 윤리적인 목적만큼이나 경제적인 목적도 띠고 있었다. 
 
‘미국이 그토록 많은 경제적 기회와 부를 창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마이크로소프트가 그토록 회의적인 세간의 시각을 극복하고 다시 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델라는 노벨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인 더글러스 노스 Douglass Cecil North의 입을 빌려 말한다. ‘적어도 기술 혁신만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고.


공감의 함정과 역설 : 공감은 절대적인 선이 아니다. 


죽어가는 회사도 살리는, 그토록 중요한 공감이란 과연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감은 사실 단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고 그 감정에 관해 생각하고, 그 감정을 배려하는 것을 포함해 사람들이 서로에게 반응하는 다양한 방식을 묘사하는 포괄적인 용어다. 그것이 유전적인 것이든, 사회/문화적인 것이든 우리는 태생부터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멈추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 인지적인 추론을 통해 우리는 그 경험을 이해하고 의식함으로써 간접적인 상황에서도 그것을 이내 상상해 볼 수 있는 정교한 능력을 갖춘다. 그러면 자연스레 더 깊은 배려가, 우리 자신의 불편한 마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진심으로 초점을 맞추는 반응이 촉발된다.

그런데 우리가 ‘공감’을 경영의 현장과 현실에 적용함에 있어 놓치지 말아야 하는 측면은 공감에도 분별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감’이 매우 중요한 것과는 별개로 그 자체가 곧 절대적인 선으로 치환될 수는 없고 때로는 ‘공감’으로 인한 실패와 갈등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더불어 오늘날 발생하는 ‘공감의 부재’로 인한 문제가 사실은 (대부분)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쉽게 설계된 인간이 ‘공감의 과잉’에 무의식적으로 대응한 역설적인 결과 일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처음 직업 교육을 시작할 때 의대생과 간호대생은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에 비해 공감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공감을 잘하는 의사의 환자는 그의 보살핌에 더 만족하고 의학적 권고사항을 더 잘 지킬 확률이 높으며, 심지어 무심한 의사의 환자보다 병에서 더 빨리 회복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 특징들이 보살피는 사람 본인의 건강에는 해로울 수 있었다. 실제로 공감력이 높은 사람들은 번아웃되거나 그만두거나 둘 다인 경우가 더 높게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처음 의사와 간호사는 처음에 보였던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을 빠르게 잃었다. 약 3년째가 되면 그들의 공감은 전체 인구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는 다시 그들이 제공하는 보살핌에 영향을 미친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어느덧 환자의 고통을 과소평가하고, 환자를 사람이 아닌 신체로 보면서 비인간화한다.

ⓒ 셔터스톡 


공감의 함정


①공감 피로 : 공감 한도 초과! 이제는 피곤해요 
우리가 모든 사람의 감정에 항상 이입한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고통스러워서 하루의 삶도 제대로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친구가 우울증에 걸렸다면 나도 우울증에 걸려 정작 그에게는 제대로 된 도움이 못 될 가능성이 크다. 1992년 칼라 조인슨Carla Joinson은 간호사 집단을 연구하면서 공감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기는 손상을 뜻하는 ‘공감 피로compassion fatigue’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필요는 무한하다. 간병인이나 보호자는 곧잘 ‘언제든 나를 좀 더 내어줄 수 있어’라 생각하지만, 때로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돕기가 불가능한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로이 바우마우스터Roy F. Baumeister가 이야기한 ‘자아 고갈’ 현상과도 맞닿아 있다. 많은 연구는 우리가 쉽게 공감하기 때문에 오히려 공감 피로로 건강이 나빠지거나 결과적으로 공감을 기피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연구에 따르면 공감을 잘하는 부모의 자녀는 분노와 급격한 기분 변화를 덜 겪으며, 스트레스에서 더 신속하게 회복한다. 그러나 그 부모에게는 대가가 따른다. 그들에게서는 저강도 염증과 세포 노화의 신호가 더 많이 나타났다. 동시에 청소년 자녀가 우울증을 겪는 경우 공감을 잘하는 부모는 그렇지 않은 부모에 비해 훨씬 더 심한 염증에 시달렸다. 과다한 공감의 위험이 누구보다 큰 이는 바로 ‘공감하는 것이 직업’이 되어야 하는 의사, 사회복지사, 치료사, 교사, 상담사와 같은 사람들이다. 일련의 직업군은 그리고 민간 기업 내에도 인사, 소비자 운영 등과 같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은 때때로 고통이나 부정의 감정에 먹혀서 스스로를 해하는 경우로 악화될 수가 있다.

미디어의 발달 역시 이 ‘공감의 역설’을 상징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평론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이란 책에서 그 문제를 지적한다. 현대의 미디어는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공감을 확장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미디어와 뉴스는 전방위적으로 폭력이나 잔혹함, 혹은 가난/전쟁의 참혹함을 보여 주는 생생한 이미지들로 뒤덮여 있다. 특히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모바일 등의 작은 화면 앞에 붙박인 채로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앙의 이미지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줬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곧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두드러질 만큼 더 커졌다는 말은 아니다.” 미디어는 우리에게 감당 못할 정도의 이미지를 쏟아 부음으로써 오히려 전 세계적인 공감 피로의 현상을 조장한다.


②공감 편향 : 옳지 않아도, 무조건 내 편 감싸 줄래요!
공감의 함정은 ‘공감 피로’ 뿐 아니라 ‘공감 편향parochial empathy’ 으로도 나타난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유아기부터 타인에게 쉽게 공감하는 성향을 보이지만, 그것은 우리와 ‘유사하다’고 느끼는 내집단에 한해서다. 인간은 심리적인 내집단을 벗어난 – 그것이 인종이든 아니면 문화적 차이든 간에 – 외집단에 대해서는 잘 공감하지 못하거나 때로는 배척하기도 하는 성향을 가졌다. 그리고 바로 이런 파편적인 공감의 특성이 사회의 갈등을 부추기고 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스탠퍼드 심리학 교수 자밀 자키Jamil Zaki는 미국 경찰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공감 편향’이 사회 갈등을 오히려 증폭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은 여전히 인종에 따른 경찰관의 차별, 과잉 대응에 따른 시민 살해 등의 이슈로 시끄럽다. 이와 관련 2017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중의 60%가 경찰관의 총격 사건들이 경찰 문화의 광범위한 문제를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찰관의 3분의 2 이상은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경찰은 대개 조직을 감싸며 방어 태세를 취한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유전적(선천적), 사회/문화적(후천적)으로 형성한 내집단에 대해서는 자발적 공감과 협력이 잘 이뤄지지만, 동시에 그 내집단을 벗어나는 순간 ‘공감 능력이 높을수록’ 오히려 외집단에 대한 경계와 갈등 수위가 극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감의 두 함정, 역설은 기업 내 조직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기업 현장에서 조직 인사를 다루는 조직은 수많은 갈등 상황의 중심에 선다. 고통과 갈등을 호소하는 구성원의 목소리에 경청하고 공감한다. 그런데 많은 구성원은 때때로 갈등 상황에서 당신의 ‘편’을 들어주고 그렇게 판단해 주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공감’의 의미로 생각하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는 내담자가 그렇게 요구하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 그렇게 감정 이입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는 때때로 문제나 이슈 해결보다 더 큰 갈등 상황을 낳고 조직 균열을 강화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또 그 중심에 있던 우리(인사조직관리 담당자)는 깊은 공감 피로에 빠지고 번아웃을 겪은 경우도 흔하다. 

컨설턴트로서 많은 기업의 조직 건강도 진단 설문을 시행하면 거의 모든 회사에서 드러나는 전형적 패턴 역시 일련의 현상을 뒷받침한다. 대부분 자신이 속한 소규모 내집단(팀 등)에서의 협력과 소통은 그 조직이 큰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문항 평균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기록하지만 외집단 간의 협력과 소통은 상대적으로 저조하고 낮은 수치를 나타낸다.


성숙한 공감을 향하여


나는 공감으로 인해 선의를 베풀게 될 때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선입견이 개입해 자칫 편파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판단을 내리게 만들 수 있다. 공감에서 비롯한 근시안적 행동은 당장에는 상황을 좋게 만들지 몰라도 먼 미래에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나친 공감은 어리석을뿐더러 다수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폭력을 촉발할 수도 있고 공감이 안 된 타인을 대상으로 전쟁 및 대학살을 일으키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개인적 관계 역시 좀먹어서 영혼을 지치게 할뿐더러 친절함과 사랑의 힘까지 약화시킨다.
<폴 블룸Paul Bloom, 『공감에 반대한다』 서문[v] 중>

공감의 메커니즘과 공감의 함정은 우리가 단지 자연스럽게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공감은 바람직하지만 그 한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직관적인 공감, 즉 ‘경험 공유’에 주로 기댈 때 우리는 오히려 공감 피로와 공감 편향에 무의식적으로 빠져 버리기 쉽다. 때문에 단지 우리가 공감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우리가 속한 조직과 사회를 더 낫게 만들 수 없다. 

때로는 가족에게도 그렇다.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공감은 때때로 부모들이 아이들의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데 이는 자칫 아이를 스포일드 차일드Spoiled Child를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공감하는 경향이 강하면 공정하게 평가하는 능력이나 도덕적 행동 능력도 오히려 저하시킬 수 있다. 숫자에 둔감해지는 것도 한 가지 증상으로, 한두 사람을 도울 때는 도덕적으로 충만해져 기부도 많이 하지만 더 많은 수의 사람에 대해서는 돕고 싶은 마음도 줄어든다.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게 만드는 개인적 이야기들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감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는 공감하되, 성숙한 공감이 무엇인지, 제대로 공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고, 의식하고, 그에 비롯한 전략을 바탕으로 의식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 셔터스톡 


전략적으로 공감하는 방법 



1. 공감 말고, 염려하기 
첫째, 우리는 공감의 현장에서 우리의 공감이 그저 걱정과 괴로움으로 치환되는 보통의 과정을 그보다 좀 더 성숙한 ‘염려’로 연결해야 한다. 괴로움, 걱정은 정서적 공감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직간접적으로 떠안음으로써 그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 염려는 누군가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안녕이 향상되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타인의 고통을 떠안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염려하는’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염려/자비와 걱정/괴로움은 매우 밀접해 보이지만 전문가에 따르면 그 두 영역이 항상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둘은 아주 약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이다. 깊은 괴로움을 경험하는 사람이 반드시 깊이 염려하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두 상태는 유발하는 행동도 서로 다르다. 쉽게 괴로움에 빠지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회피한다. 예컨대 자신을 감정적으로 힘든 상황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은 가능한 외면한다. 괴로워하기보다 염려하는 편인 사람은 그렇지 않다. 괴로움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염려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질적인 감정에 맞서려 하거나 혹은 그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 파악해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구분하고 인지하는 이런 능력을 ‘감정 세분화emotional granularity’라고 부른다. 존 가트맨에 따르면 감정 세분화는 감정 관리, 자비, 연민, 마음 챙김 부분에서 다뤘듯 우리가 감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스스로 진단하며 세분화해 이름을 붙여보는 연습을 통해 강화할 수 있다.


2. 효율적 이타주의로 공감 승화하기 
둘째는 공감을 ‘효율적 이타주의’로 승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백혈병 진단을 받고 3년째 항암 치료를 하며 투병 중인 다섯 살 소년 마일스 스콧의 소원은 ‘배트키드Batkid가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비영리 기관 메이크어위시 재단Make-A-Wish Foundation은 이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대대적인 이벤트를 마련한다. 이 이벤트는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어린이의 소원 한 건당 들어가는 평균 비용이 약 7500달러(약 840만 원)이다. 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여기서 묻는다. 한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과 한 생명을 구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우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생명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돈은 말라리아 예방에 써서 최소한 어린이 세 명 또는 그보다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좋은 일 아닌가? 

우리의 이타적 행위가 실제로 좋은 결과로 이어지려면, 우리는 각자 할 수 있는 한에서 선을 최대화할 방법을 합리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피터 싱어가 들려주는 배트키드 이야기는 직관적 공감에 따른 따듯한 기부가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진정 더 나은 조직, 사회를 원한다면 우리는 공감하되, 균형 잡힌 공감을 해야 한다. 단지 ‘정서적 공감’, 동정심만으로 행하는 대신 실질적으로 무엇이 내가 속한 조직 혹은 사회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숙고하는 태도를 싱어는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이라 이름 붙였다.

미래학자 아리 발라흐Ari Wallach는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일하는 동안 고객들이 점점 더 단기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단기적 사고가 언제나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불확실성이 높은 현실 속에서 현재에 집중하는 것은 새로운 경영의 패러다임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것만 봐서는 곤란하다. 특히 우리 미래의 안녕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폴 블룸Paul Bloom은 공감이 지금, 여기에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우리의 공감을 반대로 막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공감은 시간, 상황에 따라 때때로 “편파적이고, 수치가 중요한 상황에서도 계산을 못하고 무시해 버리며,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든다.” 

그는 다시 질문한다. “자기 손가락을 잃는 것과 저 옆 나라의 수천 명이 죽는 것 중 우리는 어떤 것에 더 공감하는가?” 당연히 자신의 손가락이다. 일련의 맥락에서 그는 (잘못된) 공감이 선행을 추구하는 동기로 사용될 때나 옳고 그름을 가려서 행동하는 기준이 될 때 오히려 그 결과는 나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선천적인 공감에 기대어 더 나은 의사결정과 협력, 나아가 더 나은 조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걸음 물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의식적으로 ‘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감이 때로는 편파적이고 단편적이고 단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공감의 과학이 우리에게 전하는 사실은, 공감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조직의 쓴맛> 시리즈 보러 가기



글ㅣ상효이재
필자는 기업과 경영 컨설팅 회사에서 조직인사, 기업 위험/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퍼블릭 어페어즈(Public Affairs) 전략 영역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포스트 테일러리즘 철학 기반의 조직, 문화, 전략, 변화관리에 관심을 두고 조직과 개인의 실질적인 성장과 통합을 돕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스타트업 인사를 리드했고 현재는 핀테크 스타트업 어니스트펀드의 인사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네이키드 애자일(미래의 창, 장재웅 공저)’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workplays)



발행일 2021.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