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에누마 서비스 기획자
정해진 직무의 범위라는 게 딱히 없는 스타트업 기획자의 하루. 나는 매일 다양한 종류의 일을 만난다. 일이란 것이 그러하듯 당연히 어떤 일은 좋고 어떤 일은 조금 귀찮다. 현재 직장에 입사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업무 하나를 떠올려봤다. 바로 우리 앱을 사용하는 인도네시아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오디오 파일 분석 일감이다. 녹음된 파일의 품질을 평가하기 위해 할당된 수백 개의 파일을 하나하나 들어봐야 하는, 언뜻 느끼기엔 좀 기계적이고 지루할 수 있는 작업. 그 속에서 예기치 못한 기쁨이 꽃 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스타트업 커리어의 시작이었던 베를린 Rocket Internet 사무실 풍경 ⓒ 조셉
베를린에서 스타트업 PM으로 일을 시작한 2014년부터 16년 사이는 질문을 더욱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시기였다. 당시 <피로사회>란 책으로 한국 사회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철학자 한병철과 VR의 아버지 자론 레니어(Jaron Lanier)의 생각에 큰 영향을 받아 ‘더욱 인간적인 웹/모바일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일에도 접목시켜보고자 했다. 물론 경험도 실력도 없는 내가 현장에서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좀 더 주도적으로 내 생각을 실험해 보고 싶단 생각에 PM이면서 UX 설계 업무도 할 수 있는 회사를 찾아 이직도 해봤지만 당연히 이상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수익창출을 위해 웹사이트에 못생긴 팝업을 띄우고, 배너를 붙여야 하는 내 나름의 치욕을(?) 겪으며 이래저래 혼란스럽던 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3년 남짓의 베를린 생활을 정리한 후 영국 GDS (Government Digital Service)에서 PM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영국 공공서비스의 디지털 개혁을 주 업무로 하는 팀으로 내각실 (Cabinet Office) 산하의 정부 조직이면서도 스타트업의 문화와 업무방식을 가졌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이직할 시 같은 PM 포지션인데도 업계가 바뀌면서 주니어 레벨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수익창출을 목표로 하는 팀이 아니다보니 좀 더 순수하게 사용자의 경험에 초점을 맞춘 서비스 디자인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 내겐 더 큰 메리트로 다가왔고, 기회를 잡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남녀노소와 장애 유무를 모두 포용하는 디자인 원칙을 서비스 기획에 접목해 볼 수 있었던 경험은 몇 년간 가져온 질문 (‘보다 인간적인 웹의 모습')에 대한 답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랬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사기업 환경의 역동성이 그립기도 했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