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된 갭이어는 아니었어요

계획된 갭이어는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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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티클은 <프리워커로 살아남기> 시리즈의 3화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정말 잘하는 것, 못 하는 것, 싫어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좋아하고 하고 싶은 걸 넘어 본질적으로 욕망하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나를 둘러싼 환경과 자원, 내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철학과 원칙,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소중히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셔터스톡


남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들 


계획된 갭이어, 사이드 프로젝트, 커뮤니티, 개인 브랜딩 등이 각광받는 시대다. 구체적인 목표에 점을 찍어두고 차근차근, 성실히 만들어 가는 것이 훨씬 더 기대한 결과를 충족시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행처럼 마치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을 양산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 않는가? 

많은 사람이 성공, 승진, 부 등의 목표를 세운다. 그리고 이것들을 달성하려면 해야 한다는 ‘정답’처럼 여겨지는 방법을 찾아 달려간다. 물론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나’를 놓친 채 휩쓸리기도 쉽다. 가장 나다움을 찾고 삶을 채워가야 하는 것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간과한 채 말이다. 

나다움을 찾는 건 가장 중요하고 무엇보다 선명해져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린 사회 속, 직장 속, 관계 속의 ‘one of them’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라. 더구나 내 일을 좀 더 주도적으로 할지는 몰라도 내 일을 선택하고 설계하기엔 한계가 있는 직장인들은 더더욱! 

이 측면에서 본다면 꼭 뭔가를 이루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 아니더라도 나를 찾기 위한 노력이 수반된 쉼표는 찍어볼 만하다 생각한다. 나는 현재 6개월 넘게 휴식 중이다. 처음에는 휴식 기간 동안의 경험을 부담 없이 나누면 된다는 이번 원고 요청을 받고 고민했었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해도 될까’ ‘아직 넥스트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형으로 결론 없이 마무리해도 될까’ 하는 고민. 

왜냐하면 나는 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휴식 기간에 대해 어떤 사전 계획도 없었고, 지금도 또렷한 목표를 가지고 보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 셔터스톡


직장 생활, 시작은 별거 없었다


스물한 살부터 직장이란 형태는 아니었어도 일을 시작했으니 20년이 훌쩍 넘는 기간을 쉬지 않고 쭉 달려온 셈이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 밤낮으로 일했고, 직장이란 곳에 취업한 후엔 동기들보다 몇 년 늦은 시작에 대한 조급함으로 또 일했다. 어설픈 경영자로 남에게 월급 주는 입장으로 작은 성공과 큰 실패도 해보면서 말이다. 

이후 대기업에서 11년을 재직했고, 스타트업으로 넘어오기 전 휴식기간을 반년 정도 가질 계획이었다. 20년 넘게 한 번의 쉼 없이 쭉 달리기만 했으니 좀 쉬어도 괜찮다며 어학연수라는 핑계로 인근 국가의 작은 시골마을로 떠날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으니.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상상조차 못 한 전염병의 창궐로 모든 계획이 무산되어 버렸다. 그리고 퇴사 직후 우연히 생긴 자리에서 알게 된 스타트업에 바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합류한 스타트업에서 1인 인사로 일을 시작했다. 모자람이 많아 아쉬움은 많았을망정 나의 진심과 최선은 다했기에 후회는 없는 시간을 보냈다. ‘힘들었냐’ 하면 그랬고, ‘즐거웠냐’ 하면 역시 그랬다. 

하지만 뜨거웠던 나의 첫 스타트업 생활은 1년 4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건강에 제동이 걸리며 수술 후 회복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2개월 정도 쉬려던 생각과 달리 어느덧 반년을 넘기고 있다. 


어쩌다 보니 프리워커


‘갭이어: 잠시 멈춰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흥미와 적성, 진로를 찾는 기간’

명확히 따진다면 애초에 단순 휴직 정도로 생각했던 난 갭이어를 계획했다고 볼 수는 없다. 복직하고, 기존에 하던 일을 ‘더 열심히’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지한 인생 설계를 위한 의도를 갖고 프리워커를 시작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나는 중년의 나이, 한참 일해서 어느 정도 커리어가 성숙됨과 동시에 가장 불안할 수도 있는 이 시기에 긴 휴식을 하게 된 걸까.

막연히 휴직을 생각하던 시기,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의 이상과 함께 심리적으로도 번아웃이 찾아왔다. 이 과정에서 ‘나 돌보기’에 모든 정신을 쏟자며 휴직이 아닌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스타트업에 와서 오랜 기간 ‘전문가’로 성장하고 인정받기 위해 쌓아 왔던 것들이 뭐 하나 맘처럼 되는 게 없었기에 꽤나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이 시기 나를 가장 괴롭혔던 건 ‘그동안 내가 해왔던 것이 모두 틀렸던 걸까’, ‘가짜인가’,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는 잘할 수 있을까’라는 자기 비난에 가까운 침울함이었다. 때문에 채용 목적이나 인사 조언 요청 등의 컨텍이 있었지만 구직 의사 자체가 없었고 자신감도 떨어진 상황이다 보니 실패 경험과 시행착오 정도를 털어놓는 자리일 뿐이었다.

재밌는 건 스스로 실패라 생각한 것들이 누군가에겐 더 생생한 현실 경험이 되며 컨설팅 의뢰가 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컨설팅이나 자문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거절하기 다반사였고, 그럼에도 다양한 스타트업을 만나는 과정에서 내 생각이 정리되는 것도 있었기에 부담 없는 만남과 대화의 장은 늘어갔다. 

그러다 문득 “내가 효용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실제 현업에서 작동되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필자는 이를 검증 기간이라고 칭한다) 그러면서 가볍게 도움 될 만한 이야기나 자료들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그간 휘발되던 것들을 좀 정리해 남겨 보고 싶단 생각으로 글로 끄적이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또 많은 인연이 닿게 되었으며 그동안 ‘당연히’ 해오던 일이나 관점에 많은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마음이 더 가는 회사들은 좀 더 뭐라도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의욕은 있으나 다른 일에 밀려 흐지부지되는 경우를 접하게 되면서부터 페이를 받고 일하기 시작했다. 정성껏 도움을 드렸는데 팔로업이 안 되면 나 또한 의욕이 떨어지기에 “이제부턴 정식으로 계약하고 진행합시다!” 했던 게 발단이었다. 제대로 값을 치러 나도 열심히 하고, 회사 입장에서도 긴장감 있게 나를 잘 쓰기 바랐다. 

대부분은 막상 계약 얘기가 나오면 연락이 끊겼고 나도 미팅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기꺼이 제안을 받거나 주는 회사들과 과제를 진행하며 일의 밀도는 훨씬 커졌다. 그렇게 진지한 프로젝트가 하나, 둘 늘어가면서 어느 순간 회사 다닐 때 마냥 일하고 어딘가 방문할 때 소속 대신 ‘프리랜서’라 적히기 시작했다.

ⓒ 셔터스톡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심신의 휴식 → 회복 → 검증기간 → 이왕 하는 거 제대로’를 위한 시간이 순차적으로 흐르며 자신감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어떤 일을 해야 할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에 접어들었다. 물론 6개월이 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그 고민은 진행형이다. 하지만 6개월이란 시간은 무작정 일을 쉬기엔 길 지 몰라도 나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세우는 데엔 턱없이 짧을 수 있다. 그럼에도 너무나 많은 성찰과 변화를 얻고 있기에 난 이 기간을 갭이어도, 휴식도 아닌 내 삶의 터닝포인트라 말하며 충분히 누리려 하는 중이다. 

본의 아니게 일에 쉼표가 찍혔고, 쉬는 기간 일이 시작되었으며, 끄적이던 글들이 기회가 되었다. 본의 아니게 프리랜서가 되었고, 일을 고르는 상황까지 생겼다. 이 모든 건 구체적인 계획도, 어떤 목적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갔을 뿐이다. 그런데도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편안하며 내가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간다 느낀다. 


계획이 없었다 해서 노력도 없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나는 지극히 운이 좋았다 생각한다. 주변에 나를 북돋아 주고 응원하는 이들이 많았고 시행착오를 귀한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었다. 이 경험을 기꺼이 사주는 이들이 있었고. 대단한 기회까지는 아니어도 좋은 기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내가 운에만 몸을 맡겼는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다. 사전에 어떤 성과를 얻어내기 위한 설계가 없었을 뿐, 집요할 정도로 자기인식 노력에 집중했고, 스스로를 다양한 과제를 통해 검증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조금씩 관점과 나만의 관(觀)을 수정 보완해 나갔다. 그 수정된 부분들을 다시 검증하는 일을 반복했고 발전시켜 나갔으며 머릿속이나 구두로 나누어 휘발되던 걸 새기기 위해 부족하나마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에 필요한 학습도 병행해 가며, 너무 힘주지 않으면서도 느슨해지지 않도록 내 일에 가치를 매기고 요구하고 그에 대한 결과치를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말이다.  

앞서 내가 마치 물살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는 것 같음에도 어느 때보다 주도적으로 살아간다 느낀다 했던 건 진지하게 자신을 직면하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스스로를 소중히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는 주도적이라기보단 주체적(어떤 일을 실천하는 데 자유롭고 자주적인 성질이 있는, 네이버 국어사전)이란 말이 더 적절할 수 있겠다. 프리워커 혹은 프리랜서에서 말하는 ‘자유’보단 스스로의 원칙을 세워 행하는 ‘자율’이 더 맞을 수도 있고. 

ⓒ 이수연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프리워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무엇으로 콘텐츠를 찾을 것인지, 어떻게 경쟁력을 가질 것인지를 주로 다루지만 그 이전에 나 자신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에 훨씬 더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한다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다양한 타인의 경험 속에서 필요하면 힌트를 얻어 내 것을 찾아가려는 노력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 글이 그 다양한 경험 중 하나가 되길 기대해 본다.  

내 경우엔 건강과 퇴사로 인한 쉼이 나를 알아가는 계기를 주었고, ‘본의 아니게’ 시작한 프리워커로서의 몇 달이 다음 행보가 뭐든 날 더 단단히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내 삶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보다 선명하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고 이 모든 건 ‘쉼을 통한 여유의 확보’ 덕에 가능했다 할 수 있다. 

현업과 일상이란 프레임 속에서 바삐 살아가다 보면 아무래도 온전히 내게 집중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도 나를 찾는 것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쉬어도 괜찮다, 다 길이 있다 쉽게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내가 성의 있게 삶을 걸어왔다면, 소중한 걸 찾기 위한 잠깐의 공백이 생긴들 내 커리어가 단절되거나 인생에 위기를 가져오진 않을 거란 이야기는 조심스럽게나마 드리고 싶다.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아도, 잠시 인생에 쉼표 하나 찍어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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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ㅣ이수연 (rolling.sy@gmail.com)
(전) 고위드 HR 총괄
(전) LG이노텍 HR Professional
(전) 휴넷 L&D, 기타 연구원, 컨설턴트, 개인사업 등

내 앞에 놓인 것에 충실하며 살아온 20여 년에 잠시 쉼표를 찍고 인생의 방학을 즐기며 일과 나를 회고 중입니다. (브런치: https://brunch.co.kr)



발행일 2022.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