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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 대멸종의 시대
90년 대생은 ‘인강 세대’입니다. 인터넷 강의처럼, 영상으로 핵심만 딱딱 짚어주는 것이 익숙한 세대입니다. 따라서 직장에서도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수가 일에 대해 하나하나 상세히 알려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체계가 잘 갖춰진 대기업∙공기업이 아닌 이상, 사수는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잘 아시다시피 요즘은 한 회사에서 10년, 20년씩 근무하는 세상이 아니니까요. 더군다나 스타트업이 즐비한 IT 업계는 1~2년마다 이직을 통해 몸값을 불려 나가는 것이 일상이죠.
그중 특히나 PM의 세계에서는 원래부터 사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비즈니스, 기획, 개발 등 특정 직군에서 홀로 제품을 이끌 수 있을 정도의 실력과 연차가 된 사람이 직무로서 PM을 맡기 때문입니다. 주니어 레벨에는 PM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순이며, 대부분의 PM은 사수가 필요 없을 정도로 고연차입니다.
그러나 최근 스타트업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경력이 전혀 없는 쌩신입도 PM으로 채용되기도 합니다. 스타트업은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경쟁력으로 인해 유능한 인재 영입이 어렵기 때문에 주니어 레벨에게 그럴듯한 감투를 씌우곤 하는 것이죠. 높은 확률로 스타트업과 당사자 모두에게 끔찍한 악몽이 될 테지만, 어쩌겠나요. 여기까지 왔으면 잘 해내는 수밖에.
마인드를 리셋하라
PM으로 부여받은 첫 업무는 “마이데이터에서 인증을 쉽고 편리하게 한다”였습니다. 당시 마이데이터니 인증이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 누구도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았죠. 결국 어느 회의에서도 입 한 번 뻥끗하지 못하고 벙어리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서히 입지가 점점 좁아지더니, 이윽고 타 부서 팀장의 ‘수습 기간 후 자르고 싶다’는 험담까지 듣게 됐습니다.
그러나 사실 냉정한 말이지만 회사는 학교가 아닙니다. 회사는 배우는 곳이 아니라 받은 만큼의 결과를 돌려줘야 하는 곳이죠. 나는 더 이상 있지도 않은 사수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point 1. 오히려 좋아
회사는 참 보는 눈이 많은 곳입니다. 주니어 레벨이 사수 없이 할 수 없는 일을 맡고 있다면 이미 온 직원이 내가 고난 속에 있음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웬만한 무지나 실수는 눈감아주는 편이에요. 심지어 모두의 기대가 저 밑바닥에 있으니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요. 오히려 좋은 상황입니다.
point 02. 가보자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기세입니다. 세상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내버려 둘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끓는 열정은 주변 사람을 끌어모으는 법이죠. 게다가 PM의 대부분 업무는 진흙탕같이 불편한 상황에 있고, PM은 그 속을 헤쳐가는 사람입니다. 기세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point 03. 내가 최고야
옆자리 PM이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더라도 자신이 맡은 업무 이외는 문외한이기 마련입니다. PM의 세계는 의료계와 같아서 공통의 기초 지식은 공유하지만 각 특정 분야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알아서도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맡은 업무는 언제나 정답을 말할 수 있도록 공부가 필요합니다. 순간순간이 쌓여 신뢰를 형성하고, 어느 순간 리더마저도 나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때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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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업무를 마스터하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맡은 업무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봐도 ‘인증’은 갓 PM이 되자마자 맡기에 너무 어려운 분야였습니다. 단어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처참한 수준이라, 늘 메모를 습관화했고요. 회의 참석 시 모든 내용을 녹음해 필사했고 그중 모르는 단어는 알 때까지 검색과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머릿속에 방대한 정보가 들어차 터지기 일보 직전일 때, 다른 PM 분께서 책 한 권을 건넸습니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그룹 맥킨지의 논리적 사고 기술을 정리한 책, “로지컬 씽킹(Logical Thinking)” 이었습니다. 그중 정보를 중복도, 누락도 없이 집합으로 나누는 MECE(Mutually Exclusive and Collectively Exhaustive) 분류법에 주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사용자를 MECE 분류법으로 나눈다면 연령, 성별, 지역 등의 기준이 있는 식이죠.
저는 단박에 이 방법론으로 PM 일을 마스터할 수 있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PM의 업무는 크게 기획과 일정 관리로 나뉘는데요. 기획의 상당 시간은 무언가를 알아보느라 허비하는데, 이때 MECE 방식으로 효율화할 수 있었거든요.
먼저 머릿속 정보를 서비스와 컴플라이언스 그리고 기술 관점으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하위 그룹을 기존안과 변경안으로 체계화했고요. 그 결과 데이터 3법 개정, 전자서명법 개정, 스크래핑, 마이데이터 등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던 개념들이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업무가 무엇인지 이해하면 반절은 끝난 셈입니다. 이후 관련 담당자들과 회의해 모든 정책을 확정하게 되고 이후 이전에 누군가가 만든 기획서 포맷에 정리한 내용을 끼워 넣으면 기획서가 완성됩니다.
이후 완성된 기획서를 토대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작업에 착수합니다. 이때 대고객 오픈 일자를 역산해 일정을 잡습니다. 일정 관리는 각 직군 내에서 상시로 이뤄지므로, PM은 큰 일정만 관리하면 됩니다. 마감 일자에 가까운 업무가 지연되지 않을지 확인하고 지연된 업무의 까닭과 변경된 마감 일자를 반영합니다. JIRA 등의 일정 관리 툴을 사용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