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누비며 개발하는 BBC 노마드 코더

세상을 누비며 개발하는 BBC 노마드 코더

일자

상시
유형
아티클
태그
이 아티클은 <세상의 모든 개발자> 시리즈의 1화입니다. 


마더 테레사 정신이 없어도 간호사를 잘하며 잘 먹고 삽니다. (개발자 역시) 일하지 않는 시간까지 개발 생각을 할 만큼 개발을 좋아하지 않고,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하고, 일하는 시간 말고는 컴퓨터를 보지 않는 개발자들을 아주 많이 봤습니다. 모두 실력 있고 인정받는 개발자들이고요. 직업은 특별한 사명 없이 그저 경제적 수단이어도 됩니다. 오피스에 있는 시간 내내 업무를 성실히 한다면 저런 열정과 관심은 필수가 아닙니다. 

<헤더 님의 코멘트 중>

ⓒ 셔터스톡



아메리칸 드림 말고 노마드 드림

 
고등학교는 외고, 대학교는 명문대, 취업은 대기업. 우리는 언제까지 경쟁해야 하는 걸까. 사회는 열정을 강조하지만, 성과 없는 열정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합격이 아니면 실패가 돼버리는 경쟁 사회 속 노력이 부족해서란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Q. 대한민국은 현재 85만 명이 취업 준비생이라고 합니다. 일부는 사회가 정의하는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몇 년을 준비하기도 하죠. 헤더 님 또한 공기업 취업을 준비하셨어요. 어떤 이유로 국내 취업에 회의감을 느끼게 되셨나요? 

해외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서 해외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기업 준비를 하면서도 코트라(KOTRA,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처럼 해외 근무가 가능한 기업을 노렸고요. 스페인어랑 영어를 잘 하니까 가능성이 높을 거라 생각했는데 경쟁자들이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세 번 정도 도전했는데 아쉽게 면접에서 떨어졌죠. 

국제기구에서 잠깐 인턴도 했었는데요. 그런 거 있잖아요. 엄청난 노력을 하고 경쟁을 이겨내 입사했는데 막상 입사하고 나니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정말 작은 일을 하니까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노력해서 이 자리에 온 건가’란 생각도 들었어요. 기대가 너무 높았다 보니 실망도 컸던 거 같아요. 

우리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그 정도의 스펙과 노력이 필요한 일들이 아닌데 국내는 너무 스펙 인플레이션이 심한 게 아닌가란 생각을 자주 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굳이 한국에서 싸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외로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죠. 망하더라도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망하는 게 낫잖아요.(웃음) 그래서 국내 취업을 관두고 해외로 나오게 됐어요. 

 
Q. 해외에서 일하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다양한 직무에 지원하셨어요. 그중 개발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한창 공기업 취업 준비를 할 때는 하루 10시간씩 공부를 했어요. 그걸 보는 개발자 친구들이 ‘매일 10시간씩 공부할 열정을 개발에 쏟으면 6개월이면 개발자 가능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살짝 혹한 것도 있었죠. 공기업 취업을 위해 공부한 내용들은 공기업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데 개발 공부는 다르니까요. 

그리고 해외 개발자의 삶이라고 하면 막연히 멋있어 보이긴 했지만 어떤 건지 정확히 몰랐는데, 스페인 개발자 친구를 보며 구체적으로 느끼게 됐죠. 그 친구는 겨울이면 태국과 베트남, 발리에 살고 여름에는 유럽에 가요. 재택근무를 하기 때문에 여행하면서 노마드 개발자로 사는 거예요. 그런 삶을 제가 눈으로 보니까 해외 개발자의 삶이란 게 어떤 건지 느껴지잖아요. 개발하면 이런 삶을 꿈꿀 수 있겠구나 하면서 자극이 됐죠. 

물론 개발 외에도 해외 취업의 기회는 있었어요. 오랫동안 영어 강사를 해서 영어도 잘하고, 스페인어도 가능했거든요. 그런데 해외에서 살아남으려면 언어 능력을 뛰어넘는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인치고 외국어 잘하네’가 아니라, 한국인 명함을 내려놓고도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개발은 어떤 나라든 취업을 가능하게 해줄 여권이 되어줄 거라 믿었어요. 많은 국가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필요로 하고 있고, 개발자는 기술 전문직이지만 국가마다 다른 자격증이 필요한 일도 아니기에 어디든지 갈 수 있을 테니까요.

파라과이에서 수박을 사 먹을 돈이 없었던 시절, 돈을 모아 발등에 수박을 그렸다. ⓒ 헤더  

 

Q. 블로그 닉네임이 ‘노마드 헤더’예요. 노마드란 유목민, 즉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일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헤더 님이 꿈꾸는 삶은 어떤 걸까요?

▶ 헤더 님 블로그

제가 꿈꾸는 삶은 제가 원하는 구성요소들을 모두 갖추는 거예요. 저는 햇살을 좋아하고 질 좋은 야채와 과일 섭취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사람들이 많은 복잡한 공간보다는 산과 바다 같은 자연을 선호하고요. 그리고 가족과 친구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걸 좋아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만족시키며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걸 내 손으로 만드는 것. 이렇게 사는 게 제 꿈이에요. 해외에서 재택근무를 계속 해왔기에 지금껏 다양한 나라에서 일하며 노마드로 살아왔어요. 햇살이 필요할 때는 햇살을 찾아가고 바다가 필요할 때면 바닷가 동네에서 일상을 이어가죠. 떠돌면서 사는 걸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원하는 요소가 모두 갖춰진 곳에 정착하기 위한 여정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이죠. 

 
Q. 영국, 스페인, 파라과이 등 여러 국가에서 일하며 노마드 개발자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유럽의 경우 아시아에 비해 업무 강도가 낮고 복지가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실제 해외 근무 환경은 어떤가요?

유럽 회사의 경우 재택근무가 가능한 경우가 많더라고요. 스페인 회사에 다닐 땐 스페인에 가지도 않았어요. 재택근무라 다른 나라에서도 일해도 되니까요. 간혹 금융권처럼 보안이 중요한 곳들은 하이브리드로 근무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재택근무인 곳이 많습니다. 그리고 워라밸이 좋아 삶을 보장받는 게 좋아요. 퇴근 후 연락하는 것이 실례라는 걸 사회 전체가 공감하는 것이죠. 또 직급에 관계없이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고 기회도 많이 주어져서 일하는 것 자체도 보람 있어요. 

특히 영국은 노동법이 강해서 야근, 주말 출근 이런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아요. 정부가 경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법적인 규제를 공격적으로 풀어서 더 많은 산업이 디지털화될 수 있게 돕고 있고요. 개발 문화도 아주 성숙하기에 엔지니어로서 다양한 프로젝트와 기술을 만날 수 있고 그만큼 좋은 임금도 받죠. 

 
Q. 성숙한 개발 문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요?

기본적으로 빠르게 처리하는 속도전이 아니기 때문에 압박도 없고 코드 리뷰도 꼼꼼하게 해주며 서로 페어링 하는 게 익숙합니다. 이해가 안 되면 ‘같이 해결해 보자’라는 마인드가 일반적이죠. 

한국엔 개발 팀, 마케팅 팀, 디자인 팀처럼 직무로 팀이 구분되어 있다면 유럽은 팀이 크로스 펑션(Cross-functional)하게 구성되어 있어요. 프로덕트 팀이 여러 개 있고 그 프로덕트 팀 안에 개발자, 디자이너, 마케터들이 속해 있죠. BBC 근무할 땐 이런 팀이 500개 정도 됐고, 각자 하나의 작은 스타트업처럼 프로덕트의 처음부터 끝까지 성장을 시켜요. 그래서 BBC에는 ‘팀마다 쓰는 스펙이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란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민주적으로 하나하나 협업하는 건 디폴트고요. 

리더의 경우 팀원에게 피드백을 받는 ‘360도 피드백’이란 게 있는데요. 리더 역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팀원 역시 리더에게 쓴 말을 하는 게 가능합니다. 상사한테 소위 갈굼 당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게 있을 수가 없어요. 

 
Q. 일부 개발자들, 특히 SI 개발자의 경우 부족한 시간 내에 완성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압박감을 많이 느끼더라고요. 

저는 심리학 전공에 영어강사도, 사업도 이것저것 해보고 개발자를 한 거잖아요. 경험상 말하자면 일의 특성상 개발자는 타임 프레셔가 있으면 안 돼요. 개발자들을 진짜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라 생각해요. 수학을 예로 들자면 더하기 빼기 같은 단순 공식은 빠르게 풀 수 있지만, 수능 문제는 시간 압박을 한다고 풀리는 게 아니잖아요. 정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이 공식 저 공식 쓰면서 답을 찾아갈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개발도 머리를 써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거라 급하게 한다고 해서 풀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머릿속으로 그리며 가설을 세워보고 실제로 작동하는지 만들어 보면서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돼요. 하나의 솔루션을 위해 다양한 방법이 있고 푸는 방법도 다른데 여유가 있어야 잘 할 수 있을 거란 말이죠. 그래서 데드라인으로 압박을 주게 되면 너무 고통스러울 거예요. 열심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요. 문제가 풀려야 코드를 짤 거 아니겠어요?

BBC 동료들과 함께 ⓒ 헤더  

 

어쩌다 보니 개발자가 되었습니다

 
직장과 직무를 선택하는 일에 반드시 직업적 소명이 필요할까? 누군가가 자아실현을 위해 직업을 택하는 거라면, 누군가는 경제적 수단으로서 직업을 택할 수도 있다. 일을 즐기지 않아도 좋다. 당신이 행복한 걸 하기 위해 그 일을 선택한 것이라면.

 
Q. 개발 직무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일단 개발자는 재택근무가 가능해요. 물리적으로 자유로우니 항상 같은 곳에서 업무할 필요가 없죠. 기회도 많고 특히 월급도 좋아요. 그리고 이건 매력적으로 느껴지실지 잘 모르겠는데, 뇌를 많이 쓸 수 있어요.(웃음) 타고나지 못한 논리적 사고방식을 훈련시켜 주죠. 가끔은 '뇌를 많이 써서 손상 가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단순 반복 업무나 회의감이 드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는 스타일이라 조금 힘들어도 보람 있는 일이 좋은 것 같아요.


여러분이 꿈꿔온 삶은 절대 불가능한 게 아니에요. ⓒ 유니크 영



Q. 해외 취업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고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헤더 님의 유니크 영 프로그램

대부분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를 고민하시더라고요. 저는 취준을 하며 고생을 좀 했었기 때문에 20대에게 느끼는 애착이 커요. 죽을 만큼 열심히 하는데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없는, 이런 허무한 상황을 견디고 있을 테니까요. 그런 분들을 보면 항상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본인이 지금 원하는 게 자기 그릇에 비해 넘치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요. 나와 비슷한 길을 가는 사람이 많이 없더라도 분명 거기서 본인을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이죠. ‘유니크 영’ 또한 그런 의미에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 갑자기 감성적이게 되네요.(웃음)

 
Q. ‘잘 할 수 있을까요’란 질문에 헤더 님은 어떻게 조언해 주시는 지도 궁금합니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는데 개발만큼은 혼자서 무료로, 아니면 소액으로 공부할 수 있는 자료가 정말 많아요. 그래서 사실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물론 상대적으로는 잘 못할 수도 있죠. 개발자 동료 중에는 7살 때부터 프로그래밍을 한 동료도 있으니까 당연히 그런 사람들보다는 못할 거예요. 그래도 업무는 할 수 있고 월급도 받아요. 제가 그래요. 

1분 1초가 즐겁고 내 적성에 꼭 맞는 일을 하고 싶다면 개발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적성에 맞지 않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봐요. 그놈의 적성을 포기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본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조금 간단하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일은 어차피 삶의 일부일 뿐이니까요.  


Q. ‘적성에 맞지 않으면 어렵다’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쫓아갈 수 없다’ ‘타고난 일부 개발자 외에는 성공하기 어렵다’ 등 비전공자의 개발자 전향을 고민하게 만드는 소문들이 많은데요. 개발자로 전향하려는 분들께 조언을 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금 마음을 먹었다면 개발자로 취직을 할 때까지, 그리고 주니어 시절에도 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을 거예요. 저도 초반엔 많이 혼란스럽고 잘못된 길을 시작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개발이 아니더라도 모든 일은 사실 힘들어요. 우리가 안 해본 일이고 익숙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한 번에 잘할 수 없는 거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성공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비전공자가 개발을 공부해서 생활코딩의 이고잉 님*처럼 멋진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저처럼 일반 회사에서 일하면서 월급 받는 개발자가 될 수도 있어요. 저는 엄청 성공한 건 아니지만 밥은 벌어먹고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이 꿈꾸는 개발자로서의 커리어가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만들며 회사에서 엄청난 인정을 받는 게 아니라 그냥 좋은 봉급 받으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면 충분히 괜찮은 선택이라고 봐요. 

*생활코딩, 오픈튜토리얼스를 만든 대한민국의 프로그래머


유럽에서 만난 동료들과 함께 ⓒ 헤더  



일만 잘 하면 됐지, 열정도 필요한가요? 

 
열정이 없다고 나태한 건 아니다. 직업적 사명이 없어도 책임은 다할 수 있다. 엔지니어 헤더는 '꿈이 반드시 커리어와 관련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열정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중요한 건 당신의 행복을 찾는 거라고. 

 
Q. “간호사라고 해서 반드시 ‘마더 테레사’ 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헤더 님이 생각하는 일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적 사명을 타고나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배우, 엔지니어들을 보면 ‘이 사람들은 정말 적성에 맞는 업을 잘 찾았구나’하는 생각을 해요. 저 또한 어렸을 때에는 ‘직업이 곧 나’라는 생각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고요. 근데 그 적성, 오래도록 못 찾는 사람도 많잖아요. 저도 직업으로서 사명을 찾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반드시 직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이런 선입견 때문에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는 것 같아요.

만일 업을 찾았다면, 그리고 그게 나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라면 너무 좋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그냥 직업을 통해 돈을 벌고 그걸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저에게 일은 제가 세상을 탐험하며 노는, 인생을 지탱하는 기본이랄까요. 일 자체라기보다는 월급이죠. 너무 고통스럽지도 않고 가끔은 즐겁기도 한 개발이라는 일을 하고 있고요. 일은 제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것이에요. 


ⓒ 헤더  

 

Q. 헤더 님의 삶의 1순위는 행복인 것 같아요. 행복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가요? 

행복하려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계속 물어봐야 해요. 자신이 행복했다고 느꼈을 때 있었던 요소들을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그걸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을지 고민하세요. 그리고 그 요소들을 자기 손으로 갖춰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여행을 참 좋아해요. 익숙하지 않은 문화, 환경을 접하며 저를 행복하게 해주는 새로운 요소들을 찾을 수 있거든요. 

 
Q. 일을 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인지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나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에게 맞는 길이 꼭 직업이어야만 할까요? 많은 사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유독 한국에서만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해요. 그래서 저는 20대 때 무척 고통스러웠어요. 

본인의 적성이 뚜렷하고 그 적성이 직업과 연결되고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는 선택이라면 너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은 아니에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것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일을 직무로 삼아도 됩니다. 

사람의 적성은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부터 자주 했다거나 칭찬을 들어서 더 열심히 했다거나, 그런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적성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일을 하다 보면 ‘이게 진짜 내 적성인가?’ 하는 순간이 분명히 와요. 아직 100세 인생 중에서 고작 2n년을 살았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찾은 적성만을 절대적으로 추앙할 필요가 없어요. 아직 못 찾은 적성도 있고 적성이라는 게 고정된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개발이 적성과 안 맞는다는 걸 알고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다 보니 발전도 조금하고, 그러면서 칭찬도 받다 보면 기분도 좋거든요. 결국 더 열정적으로 일을 하게 되고 그런 사이클이 몇 번 반복되면 ‘옛날에는 내 적성에 안 맞았는데 지금은 좀 괜찮네’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니 나에게 맞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좁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당장 맞는 길이 없어도 괜찮아요. 뭔가를 열심히 마음을 다해서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찾게 될 테니까요. 적성은 그런 게 아닐까요? 

본인의 직업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미워할 필요가 없어요. ⓒ Unsplash

 

Q. 마지막으로 커리어를 고민하는 원티드 독자분들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개발 업과 상관없이 진로 자체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돈은 벌어야 해요. 회사도 다녀야 하고. 그게 어떤 직업이든 일단 해야 해요. 그런데 본인의 직업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미워하고 자괴감을 가질 필요가 절대 없어요. 그런다고 해서 아무도 자신을 구해주지 않고요. 그렇기에 본인 스스로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게 중요하고, 그러려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좋겠죠. 그게 개발이 됐든 요즘 유행하는 N잡을 하든요. 

그러니 본인의 소비 수준을 파악하고, 남은 인생에 필요한 금액을 정한 뒤 내가 이 돈을 벌기 위해 언제까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고민해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 일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연해져요. 내 삶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자신을 맞춰나갈 수가 없어요. 

개발 6개월 차 정도 됐을 때 친구에게 ‘이거 진짜 아닌 거 같아. 재미가 너무 없고, 적성에도 안 맞아’라고 불만을 토로했거든요. 그때 개발자 친구가 이런 말을 해줬어요. ‘당연히 적성에 안 맞지. 일단 눈 딱 감고 몇 년만 해보고 돈 좀 벌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 그때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다시 생각해 보자고.’ 

우리가 놀이터에 나가서 놀아봐야 그네도 있고, 시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지, 놀아본 적 없고 놀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친구는 제가 개발을 통해 재정적인 여유를 확보하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부터 이것저것 해보면서 진짜 하고 싶은 걸 찾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3~4년이 딱 지나니까 그 말이 맞더라고요. 그전에는 좋아하는 걸 찾기에 삶이 너무 짧고 촉박하다고 느껴서 나와 맞는 길을 빨리 찾고만 싶었는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증발하는 삶을 우리 함께 붙잡고 즐겨봐요. ⓒ 셔터스톡



Q. 개발자로서의 생각을 블로그에 꾸준히 기록해 놓으시더라고요. 마지막엔 음악을 꼭 추천해 주시고요. 원티드 독자분들께 오늘 인터뷰와 어울리는 노래 한 곡을 추천해 주신다면요? 

자신에게 실망하지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김연자 아모르 파티 가사 중> 


저는 가사에 집착하는 사람인데요. 이 노래는 가사도 너무 좋고 춤추기도 좋아서 추천합니다. 이 노래를 공감할 수 있다면 진정한 어른이 된 거예요.(웃음) 세상살이 내 맘대로 편하지는 않지만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증발하는 삶을 우리 함께 붙잡고 즐겨봐요.



▶ <세상의 모든 개발자> 시리즈 보러 가기



CREDIT


김한나ㅣ원티드 콘텐츠 에디터



발행일 2022.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