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보다는 백발 디자이너로 은퇴하고 싶어요!

관리자보다는 백발 디자이너로 은퇴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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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티클은 <내가 찾던 커리어 선배> 시리즈의 3화입니다.


UX(User Experience)디자이너는 고객이 제품을 사용하는 모든 과정을 설계한다. 고객은 동일한 서비스라고 해도 화면의 구조나 버튼을 누르는 순서, 색깔, 모양 등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한다. 따라서 UX디자이너라면 시각적인 디자인은 물론, 기술과 고객의 심리까지 모두 고민해야 한다. 

김은주 님은 현재 구글 어시스턴트 UX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구글 어시스턴트는 사람이 말을 하면 기계가 음성이나 화면으로 답을 찾아주는 서비스다.  어시스턴트 팀에 소속된 수백 명의 디자이너는 인공지능이 사람의 음성에 반응하는 방식, 거리, 화면 등의 모든 과정을 설계한다. 수석 디자이너인 김은주 님은 세부적으로 나뉜 디자인 업무를 살피고 지휘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구글은 그가 나이 마흔여섯에 찾은 그의 열한 번째 직장이다. 회사도 다닐 만큼 다녀봤고, 디자인도 해볼만큼 해 본 그이지만, 입사 후 1년은 적응이 쉽지 않았다. 구글의 일하는 방식에 적응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무기력증과 불안증을 겪기도 했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이젠 누가 뭐래도 ‘구글리한 구글러’가 된 은주 님. 이제 구글은 그에게 익숙한 곳이 되었지만, 여전히 새로움으로 그의 가슴을 뛰게 한다. 

ⓒ 김은주  


“26년 차 디자이너인 저는 여전히 새로움을 추구해요. 구글은 이런 저에게 늘 새로움을 던져주는 회사예요. 이 시도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배우고 있고요.”

연차가 쌓여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관리자’보다는 ‘백발 디자이너’로 은퇴하고 싶다는 김은주 님의 커리어 이야기를 들어보자. 


마흔여섯에 구글러가 되다 


현재 하시는 일과 그동안의 커리어에 대해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CJ, 삼성전자, 마이크로소프트, 모토로라, 퀄컴 등 한국과 미국 여러 기업에서 UX 디자이너 일해 왔어요. 현재는 미국 실리콘밸리 구글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 김은주  


커리어의 첫 시작부터 UX디자인을 해오셨나요? 

처음 시작은 대학교 4학년 때 삼성 SDS에서 인터랙션 디자이너 인턴이었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계속 같은 필드에 있었는데 UX디자인 분야가 확장되고 전문화되면서 제 타이틀도 계속 바뀌었어요.  웹 디자이너,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인터페이스 디자이너, UX 디자이너 등으로요. 타이틀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는 일이긴 해요. 달라진 점은 예전에는 기술과 시스템에 사람이 적응하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기술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죠.


UX 디자이너로서 회사를 선택할 때 기준이 있나요?

일을 하면서 항상 새로움을 추구해 왔어요. 가장 두려운 것은 ‘지겨워지는 것’이죠. 이직을 할 때는 회사 자체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기회를 확인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지, 하고 싶은 일인지, 그리고 재미있을지, 새로운 경험이 내 성장에 도움이 될지 등을 고민하죠. 10년 차 정도까지는 내가 뭘 잘하는지, 뭘 재미있어 하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거 같아요. 그 후에는 어느 정도 중심을 잡고 커리어 빌드업을 했어요. 

저는 디자이너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특히 하드웨어 제품에 들어가는 UX디자인이 재미있어서 하드웨어 제품 기회를 계속 찾았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기술과 접목된 하드웨어 비즈니스, 새로운 디자인 시스템을 개발하는 플랫폼 프로젝트 쪽으로 빌드업을 하게 됐죠. 그 경험 때문에 구글에 인터뷰할 때도 제가 원하는 기회를 구체적으로 요구할 수 있었어요. 


흔히들 구글을 ‘꿈의 직장’이라고 하잖아요. UX디자이너로서 구글에서 일하는 재미는 무엇이 있으신가요? 

무엇보다 제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충족시켜 준다는 점이에요. 정말 많은 프로젝트들이 글로벌 스케일로 진행되는데 귀동냥으로만 들어도 재밌는 아이디어들이 넘쳐 나요. 많은 회사에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초기에 사장되는 아이디어가 많은데 구글에서는 자유로운 시도들이 가능하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시장에서 성공하고 안정화된 제품보다 새롭고 어려운 프로젝트에 호기심이 생기고 재미를 느껴요. 그리고 이 시도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배우죠. 끊임없이 배우고 발견하는 과정이 저를 가슴 뛰게 합니다.


구글의 일하는 방식이 다른 회사와 다른 점은 무엇이 있나요?

구글은 수많은 스타트업이 모여서 협업하고 경쟁하는 거대한 생태계 같아요. 수시로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생겼다가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선택받지 못해서 없어지기도 하고 경쟁에서 밀려나기도 해요. 그렇다 보니 자발성, 주도성, 협업 능력을 매우 중요하게 요구합니다. 탑다운 방식의 조직에서는 일사불란하게 극도의 효율성에 기반해서 업무가 진행되는 반면, 구글은 각자 성과를 만들고 그걸로 영향력과 권한을 얻고 스스로가 성장해야 살아 남을 수 있는 구조인 거죠. 묻어가는 게 불가능해요. (웃음) 

ⓒ 김은주  


UX디자이너의 성장을 말하다


UX디자이너는 디자이너로의 역량만큼이나, 소비자의 심리 파악도 중요할 거 같아요.

사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직업은 심리전이에요. 정치나 장사, 심지어 유튜브 크리에이터도 그렇죠. 예술과 디자인의 차이는 자기만족이냐 타인 만족이냐에 있는데 디자이너라면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해서 그들이 만족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색보다는 소비자가 좋아하는 색, 내가 원하는 기능보다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기능을 만들어야 하죠. 이를 위해서는 소비자의 욕구와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무엇에 왜 반응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디자인 성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워낙 사람 심리나 행동에 관심이 많아요. 요즘엔 뇌 활동과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뇌 과학 관련 책과 영상을 시간 될 때마다 챙겨보고 있어요. 


UX디자이너가 뇌 과학 콘텐츠를 챙겨본다니 새롭네요. 그만큼 신기술의 발달로 UX디자이너 영역이 다양해진다고 할 수도 있는데요, UX디자이너로 성장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면 좋을까요. 

인공지능이나 증강현실처럼 기술이 발전하면서 UX디자이너의 영역이 넓어진 부분도 있지만 UX디자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디자이너 참여가 없던 분야에서도 디자이너 참여가 늘고 있어요. 최근엔 UX디자이너가 제품 기획자의 역할까지 겸하면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쓰는 기업도 늘고 있고요. 

서비스 디자이너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서비스 경험을 디자인해요. 그래서 신기술에 앞서 나가는 게 UX디자이너의 성장이나 성공과 꼭 정비례하는 건 아니에요. 어떤 기술이나 디자인이든 결국엔 기술 이전에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잘 이해하고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요. 기술이 고도화되고 리더급으로 올라갈수록 모든 답은 사람에게 있다는 기본에 충실하고 사람에 대한 공부를 계속해나가는 게 UX디자이너로 꾸준히 성장하는 길이라고 봅니다. 


UX디자이너는 다양한 부서와 협업을 하게 되는데 협업을 잘하기 위해 어떤 원칙을 세우면 좋을까요. 

음, 반대로 내가 어떤 사람과 협업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면 좋을 거 같아요. 아마도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똑 부러지게 일하는 사람 아닐까요. 그런 사람들과는 부딪히는 일도 별로 없어요.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해내는 게 협업이라서요. 그래서 저는 제 스스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항상 노력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제 전문성에 대해 신뢰하게 되면 제 요구나 결정을 설득하기가 훨씬 쉬워지거든요. 


전문성으로 설득한다는 의미네요! 그 말과는 또 다르게 은주님은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안 하는 편이라고 하셨어요. 

문장만 보면 좀 이해하기 힘들죠? 온통 결과물과 성과에만 포커스를 맞추면 예민해지고 각을 세우게 되더라고요. 프로젝트는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는데 사람 관계가 실패하면 그건 회복이 어렵거든요. 저는 언제나 사람이 먼저고 그다음이 프로젝트예요. 결국엔 다 사람이 하는 일이거든요. 함께 일할 때 기분이 좋으면 일 자체도 훨씬 좋은 방향으로 진행돼요. 그리고 매사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큰 그림을 보려고 노력해요. 대세에 지장이 없는 부분들은 실패할 거 같아도 맡기는 편이에요. 자잘한 이슈에 감정적인 충돌이 협업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런 걸 명심하면 대부분은 잘 풀리더라고요(웃음).


현재는 팀을 리딩하고 계시는데요, 디자이너로서의 고민과 팀 리더로서의 고민은 조금 다를 거 같아요. 

사실 디자이너로서의 고민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요. 저는 디자인 결과물 자체보다는 해결하려는 문제와 만들어가는 과정을 즐기는 편이거든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기회는 또 있다고 생각하니, 그 스트레스가 조절되더라고요. 그런데 사람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은 어려운 거 같아요. 실패 없이 잘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훨씬 더 큰 감정 에너지가 소모돼요. 자식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하물며 다 큰 어른들을 어쩌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로서 연차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관리자 역할이 부여되잖아요. 

맞아요, 관리자의 역할을 요구받으면서 많은 갈등이 생기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직장인들이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가 돈보다는 상사와의 갈등이 더 높게 나온다고 하잖아요. 신학자와 목사가 다른 기술을 가진 직업인 것처럼 디자이너와 매니저는 완전히 다른 직무예요. 그런데 기업에선 실무를 잘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매니저 직급으로 올라가거든요. 기업과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 잘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도 디자이너와 관리자 역할 사이에서 ‘내가 잘하고 있나’ 라는 고민을 항상 하고 있어요. 

ⓒ 김은주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그때가 바로 위기!


은주님은 2015년 IDEA 디자인 브론즈상, 2016년 웨어러블 산업을 이끌 글로벌 18인의 여성 리더, 2020년 구글의 올해의 디자이너 등에 뽑히는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고 계십니다. 공식적으로 성과를 인정받으신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운도 분명 있었을 테고 희소가치 영향도 있었을 거예요. 저 같은 경우는 남들이 잘 안 하는 새로운 영역의 일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아직 닦여 있지 않은, 그래서 종착점을 모르는 길에 더 큰 호기심을 느껴요. 그러다 보니 짧은 경험에도 전문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실패해도 그것마저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경우가 많죠. 증강현실, 웨어러블, 인공지능 이러한 영역에서 일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걸 해내서 인정해 주는 부분들도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을 하면서 위기는 없었나요?

개인적으로는 일에서 더 이상 재미를 못 느끼면 그때가 위기예요. 재미없는 일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고 에너지가 확 떨어지는 걸 느껴요. 그럼 관련된 재밌는 연구를 찾아보거나, 프로젝트를 바꾸거나, 아니면 이직을 하죠(웃음). 커리어는 30~40년의 긴 여정이라서 고인 물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물은 흘러야 깨끗함이 유지되고 그 긴 여정이 끝나야 바다를 만나거든요. 내가 흐르지 않고 오랫동안 고여있는 느낌일 때 위기라고 느껴요. 


이전에도 다양한 활동을 해오셨지만, 유퀴즈 방송 이후에는 더욱 찾는 곳이 많아졌을 거 같아요. 

유퀴즈의 여파가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을 못 했어요. 사실 여전히 실감이 잘 안 나기는 해요. 제 일상생활에서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거든요. 외출한다고 (미국에서) 누가 저를 알아보는 것도 아니고요. 방송이 나간 후에 영상 클립에 달리는 댓글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제가 오히려 큰 힘을 얻었죠. 개인적으로 잘 봤다는 메시지도 많이 받아요. 그냥 솔직하게 내 마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게 저에게는 큰 경험이라서 감사하죠.

(유퀴즈에 출연했던 은주님)


퇴근 후에는 어떤 활동에 시간을 보내시나요? 

퇴근 후 일상은 그냥 소소해요. 저녁 만들어서 먹고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면서 쉬죠. 밤 10시에는 영어 원서 낭독 북클럽에 참여해서 영어 공부 겸 책을 읽는데 나름 스스로 뿌듯해하는 습관이에요(웃음). 요즘엔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를 읽는 중인데 아직 안 읽어 보신 분들께 추천드려요.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책이에요.


자신의 일에서 성장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 부탁 드립니다. 

인생을 길게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20~30대는 나랑 달리기를 시작한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조급함을 느끼곤 하는데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거든요. 어떤 인생을 만들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방향이 어렴풋이 잡히면 그 방향으로 묵묵히 내 속도대로 걸어가다 보면 그게 내 길이 돼요. 아직 방향조차 모른다해도 괜찮아요. 대신 다른 사람들 이야기 말고 나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그리고 뭐든 시작하세요.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을 말이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틀려도 시도해보는 것이 백 배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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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정은혜ㅣ원티드 콘텐츠 에디터 (eunhye@wantedlab.com) 



발행일 2022.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