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미대에 가서 미디어 아트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미술적 재능이 없다는 걸 알게 됐고, 재수 끝에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해 처음으로 컴퓨터를 배웠다. 결과적으로 컴퓨터와는 잘 맞았다.
“대학생 때 실리콘밸리에 콜드 메일을 200개 정도 뿌려서 Splunk라고 하는 미국 빅데이터 플랫폼 회사의 인턴으로 일했어요. 옆자리에 파이썬을 만든 Guido가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또,‘눈뜨면 신촌'이라는 크라우드 펀딩 기반 통학버스 운영 사업을 해보기도 했고요.”
수호아이오(이하 ‘수호’)의 박지수 대표는 자신이 지닌 공학적인 능력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었다. 누군가는 인문학적으로, 누군가는 사회운동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그는 실제로 만질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비록 미디어 아트의 꿈은 접었지만, 서비스 개발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창작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냉정하게 봤을 때, 실제 서비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역량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업비트로 많이 알려진 두나무에 초기 멤버로 들어가게 됐죠. 저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유저들에게 서비스적으로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유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비즈니스라고 한다면, 그전까지의 저는 어쩌면 유저랑 동떨어진 문제를 풀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었던 거지, 비즈니스적으로 의미 있는 걸 만드는 건 아니었던 거죠. 개발자 혼자서 문제를 풀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도 많았고요.”
박지수 대표 두나무 재직 시절
박지수 대표는 두나무에서 빠르게 성장하며 다양한 핀테크 서비스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가 만든 서비스에 보안 패치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의 자존심엔 매번 스크래치가 났다. 자신의 코드를 두고 ‘이렇게 고쳐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보안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알았다면 직접 고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다. 많은 주도권을 뺏기는 게 못내 아쉬웠던 그는 본격적으로 보안 연구를 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보안 대학원 석박사 통합 과정을 진학했다.
대학원에서 만든 소스코드 자동 보안 분석 서비스로 그는 각종 대회에서 수상을 거머쥐었다. 주변 사람들도 그가 만든 서비스가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서비스는 자연스럽게 매출을 찍기 시작했다. 세상이 그를 창업으로 밀어냈고, 2019년 3월 블록체인 보안 감사를 필두로 ‘수호아이오’라는 회사가 탄생했다.
개발자에서 경영인으로
“WHY보다는 HOW를 더 고민하는 게 개발자라고 생각해요. WHY에 더 집중하는 게 비즈니스고요. 유저에게 어떤 가치를 왜 줘야 하는지 비즈니스적으로 명확해야 개발자는 그 가치를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마음 놓고 고민할 수 있어요. 제가 WHY를 덜 고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인 거죠. ‘이런 이유로 이걸 만들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허술하면 함께 만들던 사람들이 결국 다 무너지는 거잖아요.”
ⓒ 수호아이오
박지수 대표는 개발자였기 때문에 WHY를 고민할 때 쓸 수 있는 무기가 많았다. 개발 코드를 이해하고 짤 수 있으니 혼자서도 시장의 문제를 발견하고, 가설을 세우고, 어느 정도 검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구현하는지, 얼마나 걸릴 문제인지 대충이라도 알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됐다.
그는 전직 개발자인 본인의 단점으로 ‘개발자를 잘 못 뽑는다는 것’을 꼽았다. 개발을 아니까 개발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또 개발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복지가 ‘나보다 더 나은 동료’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다른 회사보다도 더 많이 심사숙고해서 팀원을 뽑는다. 수호의 인사팀에겐 늘 ‘우리가 지금 일이 많다고 급하게 뽑으면 안 된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한다.
WHY를 잘 이해하는 개발자 채용하기
“개발자는 HOW에 집중하는 역할이지만, WHY를 잘 이해해야 딱 맞는 HOW를 만들 수 있다고 봐요. 그런 관점에서 수호 개발팀은 WHY에 많이 공감해 주시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HOW는 정말 위임할 수 있어요. 대부분 기업가 정신이 굉장히 강한 편이고, 실제로 회사 초기 멤버나 창업가분들이 많이 포진돼 있어요.”
ⓒ 수호아이오
현재 수호에 있는 개발자들은 입사 전에 이미 한 회사의 대표였거나, 엄청난 보상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박지수 대표는 이들을 수호에 모셔오기 위해 충분한 수준의 보상을 해주며, 재미있는 기술 문제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두나무에서 웹 개발을 할 때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도입했어요. 지금은 대중화된 기술 React가 v.0.13일 때부터 수십만 유저가 쓰는 서비스에 적용했죠. 개척해나가고 책임지는 게 저한테는 부담과 동시에 굉장히 재밌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수호 지원자분들께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걸 많이 어필하고 있어요.”
수호에서는 만약 개발자가 매출 부담 없이 정말 R&D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준다고 한다. 엔지니어가 어떤 기술 로드맵을 개발할지 최대한 존중해 주는 것이다. 다만 회사의 방향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함께 소통한다. 또, 면접 질문 같은 세세한 부분에서 수호의 문화와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에 성심성의껏 테크 질문을 준비한다.
조직을 서비스로 바라보기
사실 수호는 작년 중순 한차례의 조직 개편을 거쳤다. 박지수 대표는 두 달 동안 다른 업무를 정지시키고 자신의 모든 리소스를 조직상을 바로잡는 데에만 투자했다. 조직 문화를 담당하는 컬처팀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하고, 채용 브랜딩을 전문으로 하는 ‘누틸드’라는 팀을 만나 전문 컨설팅을 받기도 했다.
“기존에 계셨던 엔지니어분들도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았어요. 그분들을 모셔오고 충분한 퍼포먼스를 이끌어내지 못한 건 아닐까 항상 생각해요. 조직으로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제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비개발 분야의 R&R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어떻게 그런 사람들까지 아우르는 팀을 만들고 모두가 자신이 기여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서툴렀고요.”
프로덕트 중심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프로덕트를 직접적으로 개발하는 사람들과는 높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배제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개발자 출신의 경영인은 이 부분을 놓치기 쉽다. 사업 초기에는 문제가 안 될 수 있지만, 점점 고도화되고 조직으로서 발전할 때에는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다.
박지수 대표는 조직상을 잡는 과정에서 조직을 서비스로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됐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채용이라는 것은 잠재 동료들을 서로 뺏고 뺏는 게임이다. 조직마다 지향하는 핵심 가치가 있고, 같은 핵심 가치를 지향하는, 겹쳐 있는 조직끼리 경합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호가 커머스 회사는 아니더라도 쿠팡 같은 조직 문화를 꿈꾼다면 쿠팡과 인재 경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조직이 경쟁사 대비 줄 수 있는 가치가 뭔지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보다 많은 잠재 지원자들은 회사가 풀고 있는 문제보다 회사의 조직문화에 따라 지원을 결정하기도 한다.
블록체인 문제를 푸는 기업은 아직까지 굉장히 적다. 따라서 수호는 그들과 경쟁하기보다는, 자율적이고 기여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하이 퍼포먼스 기업들과 경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수호의 핵심 가치에 공감하는, ‘수호다운’ 사람들을 영입해오고 있다.
ⓒ 수호아이오
“조직 문화라는 건 굉장히 유동적인 거잖아요. 어떤 공표에 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모여있는가가 곧 문화인 거죠. 그래서 수호의 문화도 여전히 만들어지는 과정인 것 같아요. 현재까지 모이신 분들이 너무나도 훌륭하고, ‘나는 정말 복 받았다’라는 느낌을 가질 만큼 조직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커요. 어떻게 서로 더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조직입니다.”
투자는 확신으로 갚아야 하는 빚
수호는 투자를 받지 않는 팀으로 유명했다. 이미 돈을 벌고 있었고, 무리해서 투자 받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박지수 대표는 어정쩡한 마음가짐으로 투자를 받는 게 인생에서 굉장히 잘못된 선택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애매한 확신을 가진 채로 투자를 유치하려고 하면 어려울뿐더러, 설사 된다고 하더라도 서로에게 민폐라는 것이다. 수호는 긴 시간의 검증을 거쳐 어떤 비즈니스를 할지가 명확해졌고, 작년에 위메이드로부터 50억 원의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했다.
“자본을 조달하는 게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자본을 정말 조달해야 하는 단계인지 파악하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투자자분들은 저희 비즈니스가 잘 될 거라고 믿고 투자한 거잖아요. 그럼 투자를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잘 되게 해야 하는 의무감이 생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투자는 빚이고 그건 모두 갚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박지수 대표는 확신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창업 아이디어를 내는 건 쉽지만, 내가 행동까지 할 만큼 엄청난 아이디어를 내는 건 어렵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었다.
“복권을 사러 갈까 고민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죠. 당첨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을 때, 그리고 신내림이 와서 누군가가 나한테 복권 번호를 알려줬을 때. 두 가지 경우에 당연히 후자가 복권을 살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잖아요? 결국 행동까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아이디어가 그나마 사업할 만한 아이디어인 것 같아요. 냉정하게 말하면, 행동까지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 확신이 없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이죠. 확신이 있는 좋은 아이디어라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고, 만들어달라고 하고, 세상이 나를 그냥 밀어내요.”
수호는 현재 공개된 서비스 외에도, 함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여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쏟아지는 아이디어 중에서도 확신이 있는 아이디어를 선별하고, 정말 근거 있는 확신이었는지 검증하여 비즈니스화를 해나가는 구조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걸 할 거야’라는 식의 비즈니스를 하는 타입은 아니다. 가설과 검증을 반복하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간다. 애착 있던 아이디어라도 결국 포기해야 한다면, 왜 잘못 판단했는지 복기하고 가장 좋게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스스로 강한 확신이 있을 때 창업을 하는 게 모두에게 여러모로 행복한 것 같아요. 아직 그런 확신이 없다면 너무 무리해서 창업을 하기보다, 수호 같은 다양한 스타트업에서 어떤 식으로 확신을 만들어가고 검증하는지 그 과정을 함께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