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ers |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

&Workers |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

일자

상시
유형
아티클
태그
이 아티클은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시리즈의 1화입니다.


몇 해 전 시골 한옥을 덜컥 사 버렸다. 그 후 주말마다 서울에서 200km 거리의 시골을 오가며 오래된 폐가를 천천히 고쳤다. 3년이 지난 지금도 평일에는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살고, 금요일 밤이 되면 충남의 작은 마을로 퇴근한다. 

토요일 이른 아침, 별다른 채비 없이 대문을 나선다. 목적지는 집에서 멀지 않은 숲길. 마을 입구를 지나쳐 잠시 걷다 보면 평일 내내 그리웠던 나무 냄새, 흙냄새가 벌써부터 마중을 나와 있다. 숲의 초입에 다다랐다는 신호다. 겨울의 숲은 차분한 빛깔로 채워져 있다. 연둣빛으로 빛나던 봄, 초록으로 울창하던 여름, 노랗고 빨갛게 반짝이던 가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인적 드문 숲은 고요로 가득 차서 낙엽을 밟는 내 발소리만 바스락거리며 조용한 숲을 울린다. 

몇 년 전 나는 커다란 숲을 품은 시골 마을에 불쑥 찾아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흉가라 부르던 낡은 한옥을 덜컥 사 버렸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또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그 후로 주말마다 서울에서 200km 거리의 시골을 오가며 쓰러져 가는 폐가를 느리게 고쳤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꿋꿋이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스락거리는 마음 덕분이었다. 일과 사람, 도시 생활에 지쳐 피폐해진 마음.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 그 마음들이 원동력이 됐다. 시골집을 다 고친 후에는 퇴사를 할 요량이었다. ‘집과 텃밭이 있으니 굶어 죽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서둘러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도 평일에는 서울에 살며 회사에 다닌다. 열렬히 좋아하다, 어느 순간 미워했으며, 언젠가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일의 세계와 복잡한 도시 안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과는 달리 그 안에서도 건강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지낸다는 것, 매주 금요일 밤이 되면 서울을 떠나 충남의 작은 시골 마을로 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달라진 것이 또 있다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부작거리며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봄이 되면 작은 텃밭의 농부이자 시골집 소박한 화단의 가드너가 되고, 여름에는 변화무쌍한 자연을 경험하고 김미리 55 기록하는 작가가 된다. 그리고 또 어느 계절에는 다가올 계절을 단단히 대비하는 주택관리사가 된다. 계절의 사이사이에는 강연가나 재밌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다른 이가 정해준 것도, 누군가에게 고용된 것도 아니다. 내가 나에게 부여한 새로운 정체성이다. 



봄 : 적당함을 아는 농부로 살기

시골에 온 뒤 처음 맞은 계절이 봄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농부를 자처하게 됐다. 농부가 이른 봄에 심는 작물 중 하나가 감자다. 씨감자를 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적당한 깊이와 간격으로 심는 것이다. 너무 얕게 심으면, 감자가 지면에 노출되어 해를 보기 쉽다. 햇빛을 받은 감자는 초록빛으로 변하고 독성이 생겨 먹을 수 없게 된다. 반면 너무 깊게 심어도 좋지 않다. 싹을 올리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적당한 간격으로 심는 것 또한 중요한데, 한정된 텃밭 안에 가능한 많은 감자를 심으면서도 실하게 자랄 수 있는 최소의 공간을 두는 것이 노하우다. 하지만 초보 농부인 나는 그 적당함 조절에 실패해서 초록빛 감자와 씨알이 작은 감자를 잔뜩 수확하기도 한다. 

주말마다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며 생각한다. 농사는 살아가는 일과 참 닮았다고. 농사에도 삶에도 적당한 깊이와 간격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여전히 어렵다. 텃밭에 쭈그려 앉아 흙냄새를 맡으며 생각하곤 한다. 매 계절 농사를 거듭하며 새로운 실수를 하고 그것에서 배우듯, 살아가는 일에서도 기꺼이 실수하고 또 배우자고. 



여름 : 나를 위한 기록자로 살기 

“글 쓰는 사람이 될 거야. 언젠가는 꼭.” 나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 일만으로도 바빠 글을 쓸 시간이 없고, 어디에 내 놓기엔 글재주가 모자라며, 읽어줄 사람도 딱히 없는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런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잠이 오지 않던 새벽. ‘뭐든 써야 작가가 되든 말든 하지.’ 문득 그런 생각이 나를 스쳐갔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하얀 화면 속에 첫 문장을 적어 넣었다. 그게 시작점이 됐다. 

그 후로 나는 시골집의 사계절을 기록하는 성실한 기록자가 됐다. 그 기록이 얼마 전 출간한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 라는 책이다. 지금은 시골집 일상을 뉴스레터로 발행하기도, 청탁 받은 원고를 쓰기도 한다. 글을 쓸 때면 종종 그 여름날의 새벽이 떠오른다. 작고 사소한 시작점을 찍은 날.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든 쓰기 시작하는 일이었다. 시작점을 만들지 않으면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꾸준히 해 나가는 끈기도, 생각지 못한 행운을 만나는 일도, 힘들어도 끝내 극복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러나 시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가을 : 성실한 주택관리사로 살기

대저택이 나오는 시대극에는 수십 명의 집사가 나오곤 한다. 집사가 정말 저렇게 많이 필요할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시골집에 사는 지금은 너무도 이해가 된다. 작은 한옥 한 채를 돌보는 데도 이렇게 손이 많이 가니 말이다. 나는 집사를 둘 재력이 없으니 내가 집주인이자 집사가 되어야 한다. 낡고 오래된 한옥집에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갑작스런 폭우로 하수가 역류하기도 하고 오래된 돌담이 와르르 쓰러지기도 한다. 도시에서라면 얼른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지만, 시골에서는 그게 쉽지 않다. 시골 마을로 출장을 오시는 전문가 선생님이 많지도 않고 도시에 비해 비용과 시간도 많이 든다. 자연스럽게 ‘망하더라도 일단 직접 해 보자’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은 수도꼭지와 펜치를 들고 또 어느 날은 방부목과 톱을 들고 사투를 벌인다. 그럴 때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참을 끙끙거리다 마침내 내 손으로 무언가를 고치고 완성했을 때, 나는 나의 필요를 세심하게 살피고 채워주는 다정하고 멋진 사람이 돼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내가 다시 힘껏 살아갈 자신감이 된다. 



겨울 : 오롯이 나로 살기

겨울이 시작되면 작물들로 소란했던 텃밭은 조용해지고, 색색의 꽃들이 피고 지던 화단도 쉬어 간다. 우리 집은 물론 온 마을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나의 삶 속에도 이런 계절이 있다. 작은 가능성을 소중히 키우는 봄도 있고, 치열하게 성장하는 여름, 여름의 치열함을 수확으로 보상받는 가을도 있다. 그러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멈춰버린 것 같은 겨울이 오기도 한다. 이런 마음의 계절이 시작되면 항상 나는 이 혹독한 추위가 빨리 끝나기를, 얼른 사라지기를 바라며 잔뜩 웅크렸다. 그러나 지금은 시골집에서 겨울을 보내듯 마음의 계절을 대한다. 매서운 추위가 시작되는 겨울엔 난로에 딱 붙어 앉아 좋아하는 것을 읽고, 쓰고, 먹고, 마신다.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중에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낸다. 어느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 누구, 누구의 딸, 누구의 동생처럼 나에게 주어진 역할 말고 그냥 나를 가장 귀하게 대하면서. 바삐 지나온 계절을 돌아보고 다가올 계절을 차분히 준비하는 시간이다. 겨울 안에서 오롯한 나로 단단히 발 딛고 설 수 있어야 다시 성장하고 열매 맺는 계절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어느새 숲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줄지어 있다. 나무는 겨울이 되기 전,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잔뜩 움츠린다. 최소한의 수분과 양분으로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한 나무들의 방식이다. 잎을 모두 떨어뜨리자 나무의 본모습이 보인다. 그간 얼마나 큰 가지를 뻗었는지 수피는 얼마나 단단해졌는지도 이제야 보인다. 그 단단한 몸통과 가지 안에는 봄이 되면 피워낼 잎눈과 꽃눈이 가득할 것이다. 고개를 들어 다시 숲길을 바라보니 앙상한 나무가 아니라 생명력으로 가득한 나무가 보인다. 나는 다시 발소리를 낮추며 숲길을 걷는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시리즈 보러 가기 · &Workers 다운로드 이벤트 참여하기



<아티클 요약>
  • 미리 님은 몇 해 전 시골 한옥을 샀습니다. 주말마다 서울에서 200km 떨어진 시골을 오가며 폐가를 고쳤죠. 
  • 전원생활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건강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지낸다는 겁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다른 정체성을 갖습니다. 
  • 봄에는 농부로, 여름은 기록자로, 가을에는 주택관리사로, 겨울에는 오롯이 나로 살며 지친 마음을 다독입니다. 



글ᅵ김미리 
평일에는 13년 차 이커머스MD, 주말에는 3년 차 자연생활자. 시골 폐가를 덜컥 사 버린 후,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살고 있다. 틈틈이 시골집의 사계절을 기록해 에세이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를 펴냈다. 


발행일 2023.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