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하세요?”
광고대행사를 다니던 시절,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듣고 쉽게 하는 이 질문에 나는 보통 “광고 기획 일이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AE라고 해도 되지만 굳이 영어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 ‘Account executive’라는 어려운 영어 단어가 잘 생각나지도 않아서이기도 했다. 처음 면접 준비할 때 ‘A’는 당연히 ’Advertise’를 뜻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그래서인지 저 단어가 몇 년이 지나도 입에 잘 붙지 않았다.
“광고 전략 짜고, PT 하고, 따와서 광고 찍고 집행하고 그런 일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 대답한다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럼 대체로 사람들은 ‘재밌겠다, 혹은 멋있다’라는 말들을 해준다. 취업하기 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도전했었다.
사실 내 첫 직장은 타이어 회사였다. 많은 취업 준비생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졸업 시즌에 수십, 수백 개의 이력서를 여기저기 냈고, 셀 수 없는 탈락을 겪었다. 연이은 탈락에 자괴감이 온 몸을 짓누르던 마지막 학기 겨울, 한줄기 빛처럼 타이어 회사가 나를 뽑아줬고 나는 한치의 고민 없이 출근했다. ‘직장인’이라는 타이틀만 달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좋다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 마음은 채 1년을 가지 못했다. 일이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다 어렵고, 힘들다. 특히 나와 맞는 재밌는 일을 찾기란 정말 너무 힘든 일이다. 나 역시도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든 회사에 적응하고 일하려 했지만 내가 배정받은 ‘타이어 품질 관리’ 업무에서 재미를 찾기란 정말 어려웠다. (요즘은 아마 없을 텐데, 내가 첫 입사할 때만 해도 마케팅으로 공고를 내고, 다른 부서에 배정을 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타이어가 터진 이유를 알아보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일은 졸업과 동시에 물리책을 찢어버린 문과생인 ‘나에게는’ 정말 너무 재미가 없었다. 매일매일 ‘일이 재미없다’라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그럼 재밌는 일은 뭘까?’를 고민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급해서 한 가지를 오래 진득하게 잡고 있질 못했고, 직접 뭔가를 만들고 하는 걸 좋아했으며, 결과가 눈에 바로 보이는 일들을 좋아했다. 한 가지만 오래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매번 다른 일을 하고, 직접 뭔가를 하며 그 결과가 눈에 보이는 일. 내가 찾은 건 바로 ‘광고’였다. 그래, 광고대행사를 들어가자. 마음먹은 순간부터 낮에는 타이어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광고 회사 공고에 지원했다.
경력은 없지만 경험은 있습니다
광고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노력
광고대행사는 ‘꿈에 목마른 사람’ 이 많은 곳이다. 광고학과 출신도 워낙 많고,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공모전을 휩쓸고, 광고만을 꿈꾸며 직진해온 사람도 많다. 공모전 수상, 자격증 하나 없이 운 좋게 취업한 나 같은 무지한 인간이 들이밀기엔 냉혹한 곳이었다. 하지만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나는 광고 회사라면 신입사원, 인턴 할 것 없이 다 집어넣었다. 공모전 경력이나, 재학생만 받는 등 자격이 되지 않는 공고에도 다 넣었다. 그리고 결국 두 곳의 광고대행사에서 채용 전환형 인턴을 할 수 있었고, 그중 한 곳에서 최종 합격을 했다.
물론 그전에 엄청나게 많이 떨어졌다. 특히나 공채를 뽑는 시험에서는 대부분 서류 탈락이었다. 광고 전공도 아니고 공모전 경험도, 특별한 장기도 없는 내가 떨어진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합격한 두 번의 인턴은 ‘대학교 게시판에 올라오는 방학 인턴 공고문’이었다. 일부 대학 출신만을 대상으로 해 경쟁률이 상대적으로 낮았기에 서류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턴이라 서류 이후 바로 면접이었다. 면접은 5:1 정도의 경쟁률이었고, 1박 2일 동안 진행되었다. 4명이 조를 짜서 하루 동안 광고 기획과 스토리보드를 짜서 PT를 하기도 했고, 혼자서 1시간 동안 A4용지 한 장에 광고 기획을 수기로 써서 제출하기도 했다. 나는 엄청나게 뛰어난 아이디어는 없었지만 테스트 별로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것들을 빨리 파악하고 정리해서 시간 내에 완성했고 그 부분에서 점수를 땄다고 생각한다.
물론 광고 회사는 아이디어와 기획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광고 회사도 ‘회사’다. 추후 일을 시켰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도 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내 강점을 보인 것이다. 또한 이미 회사 생활을 1년간 해본 상태라 기본적인 업무를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장점이었다고 입사 후에 들었다.
그렇게 들어간 광고 회사에서 2개월의 인턴을 했고, 최종 면접을 한 번 더 본 후 나는 정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인턴일 때는 겉으로만 봤던 일 들이 신입사원이 되자 진짜 내 일이 되었다.
그래서 AE는 무슨 일을 한다고요?
광고대행사 AE가 하는 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AE는 광고 기획 일을 한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광고해야 할 제품이 있으면 그 제품을 어떻게 소비자에게 ‘팔 것인가’를 고민하고 기획하고, 제작해 집행하는 일을 한다. 경쟁 PT의 OT를 받는 시점부터 예를 들면 이렇다.
PT브리프와 팩트북 만들기
일단 AE가 광고주의 OT에 들어가서, 브리프를 듣고 온다. 회사로 돌아온 막내 AE는 광고해야 할 제품에 대한 스터디 자료, 흔히 팩트북이라고 부르는 책을 만든다. 수십 혹은 수백 페이지까지 만들기도 한다. 그 제품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제품이 뭔지, 이 제품의 어떤 부분을 광고 해야 할지 빨리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팩트북은 첫날에서 둘째 날 정도까지 보통 밤을 새가며 작업한다. 내가 전혀 모르던 분야를 맡으면 막막할 때도 많았지만 사실 나는 팩트북 만드는 걸 좋아했다. 늘 새로운 걸 찾고, 배운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변동 금리와 고정 금리도 모르던 내가 은행 관련 팩트북을 맡았을 땐 좀 힘겨웠지만.
컨셉과 크리에이티브 구체화하기
팩트북을 다 만들면 그 자료를 토대로 기획팀과 제작팀이 각자 PT준비에 들어간다. 기획은 방향성과 논리를 정리하고 제작은 크리에이티브를 만든다. 순서상으로는 기획이 먼저 방향성과 콘셉트를 정하고 제작이 그에 맞춰 크리에이티브를 만드는 게 맞지만, 대부분의 경쟁 PT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 기획도 방향에 맞춘 아이디어를 내고, 제작팀도 컨셉과 방향성을 같이 정리해온다. 이 과정이 제일 재밌고, 제일 힘들다.
제작팀과는 항상 밤에 회의를 했다. 광고대행사에서 “저녁 먹고 8시에 제작이랑 회의”라는 말은 “내일 뵙겠습니다” 와 같은 인사말처럼 당연한 말이었다. 경쟁 PT는 길어야 한 달, 빠듯할 때는 2주만에 해야 할 때도 많았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낮 동안 정리를 하고 저녁에 회의를 해서 결정하고 다음날 아침부터 다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전 방송된 <대행사>라는 드라마에서도 제작팀들이 회사에서 밤을 새며 회의를 하는 장면들이 나왔다. 일부 말도 안 되는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밤을 새우며 회의실에 갇혀 있고, 씻지 못해 머리가 산발이 되어가는 모습들을 보며 옛날 생각이 나서 많이 웃었다.
방향성과 크리에이티브가 결정되면 그때부터 더 바빠진다. 기획은 기획서를 최대한 논리적이고, 명확한 근거로 정리하고 프레젠테이션에 힘을 실을 수 있는 디자인을 한다. 제작팀은 아이디어 상태인 크리에이티브를 콘티를 그리기도 하고 영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아무래도 완성작에 가까운 크리에이티브가 광고주들이 더 이해하기도 쉽고 임팩트도 있기 때문에 경쟁 PT이더라도 대부분 영상으로 만들거나 3D 디자인 작업까지 해서 간다.
경쟁 PT 준비하기
경쟁 PT 날, 마지막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밤을 새고 나면 아침부터는 AE들의 전쟁이다. 그냥 빔으로 PT만 하거나 파일을 제출만 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출력물을 가져가야 할 경우 아침부터 회사 내의 모든 컬러 출력기에서 PT 장표를 출력한다. 그리고 고이고이 모아 잘못 나온 건 없는지 확인한 후 제본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경쟁 PT 장에 가기 전에 씻고 옷도 갈아입는다. 아무리 밤을 새고 초췌한 몰골이더라도, 경쟁 PT 하는 순간만큼은 전문가로서 깔끔하고 신뢰감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그래서 회사 내 경쟁 PT용 재킷과 구두를 놓고 다니는 분도 많았고 회사 데스크에는 복지의 일환으로 근처 사우나 쿠폰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모든 준비의 시간이 끝나고 결전의 장에서 빔 프로젝터 세팅까지 하면 막내 AE의 1차 할 일은 끝난다. PT가 끝나고 모두가 지친 상태에서 돌아와 집에 들어가서 쉬고 나면 결과가 들려온다. 떨어졌다면 다음 PT를 준비하고, 붙었다면 잠깐 기뻐한 후에 제작에 들어간다.
광고 집행하기
보고했던 크리에이티브를 다시 현실적인 예산에 맞춰 재보고를 하고, 촬영이 필요하다면 촬영하고 광고를 완성시키고, 광고주 예산에 맞춰 매체를 집행한다. 이 과정에서도 다시 지리멸렬한 수많은 잔업이 있다.
제작팀과 제작물 준비를 하면서, 비용도 깎아야 하고 매체 플랜도 준비해야 한다. TV광고라면 어떤 채널에 얼마의 비용을, 어떤 프로그램 앞뒤로 넣을 것인지 매체팀과 논의하고, 광고 심의를 받고, 제작 완료된 소재를 넘기고, 온에어까지 확인한다. AE는 커뮤니케이션을 정말 많이 해야 하는 일이다. 광고주와 제작팀 외에도 매체팀, 옥외광고팀, 온라인광고팀, 재경팀 등 많은 팀들과 이야기하는 게 일이었다. 그래서 회사 내 사람들과 업무적으로 호의적인 관계를 만들어 놓는 것도 AE의 덕목 중 하나다. 특히 재경팀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막내 AE는 돈 내보내는 일, 들어오는 일 역시도 다 체크해야 하는데 아무리 꼼꼼해도 하루에 수십, 수백 개의 광고 소재를 내보내고 처리하다 보면 실수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재경팀에게 주스라도 하나 사들고 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고정광고주 관련 업무
이렇게 경쟁PT를 준비하고, 따내고, 집행하는 사이사이에 고정광고주의 일들도 똑같이 해야 한다. 고정광고주는 주로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여러 개를 담당하기도 해 끊임없이 일이 지속된다. 새로운 제품을 광고하기도 하고, 기존 제품을 재작업해서 내놓기도 하며, 신제품이 아닌데 신제품인 척 광고를 내놓기도 한다. AE는 이 모든 것을 다 끊기지 않게 해야 한다. AE는 광고를 기획하는 사람이자, 실적을 채워야 하는 영업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매달 실적 엑셀표를 작성하고, 달성률을 체크하는 것도 막내 AE의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쟁 PT와 기존 광고주의 신규 광고가 겹치기라도 하면 극악의 워라밸을 경험하게 된다. 밸런스라는 게 없다. 낮에는 기존 광고주의 업무들을 쳐내고, 밤에는 경쟁PT를 준비하며 야근과 주말 출근이 당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