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몇 시까지 해봤니?
영화 투자 배급사로 첫 출근을 하기 전 고맙다는 인사도 드리고 합격 턱으로 술도 살 겸 회사와 연결을 해준 차장님을 만나러 광고대행사를 찾아갔다. 축하 인사와 감사 인사가 오가며 한참 술을 마시던 때 차장님이 조용하게 경고를 날렸다.
“재완 씨, 거기 술 엄청 먹어.”
나는 술을 엄청나게 잘 먹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편이기는 해서 회식 자리를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차장님은 꽤 진지하게 경고했고, 특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술을 많이 먹는다는 정보도 주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 명의 신입사원은 술에 취한 채 맨발로 호텔을 뛰어다녔다는 말과 함께. 불행히도 나는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첫 출근을 했고, 출근 둘째 날 캐리어를 들고 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코로나 이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각 투자배급사 별로 ‘000의 밤’이라고 하는 행사를 개최했었다. 이는 올해의 흥행 결과와 내년 라인업을 발표하고 자랑하는 자리로, 내가 다닌 투자배급사 역시 매해 부산 앞바다에서 크게 행사를 개최했다. 배우, 감독, 기자, 제작사, 극장, 홍보사, 디자인사, 작가 등 정말 모든 업계 사람이 다 오고, 수십, 수백 명의 손님을 맞이하고 나면 새벽 1시가 넘어 끝나는 행사였다. 부산국제영화제 회식이 무서운 점은 그 행사가 모두 끝나고 난 뒤인 새벽 2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새로 입사한 사람들은 모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의리주와 삼배주를 진행하는 것이 회사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출근 둘째 날을 맞이한 쌩 신입이었고, 무려 전 직장과도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절대 만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로 회식자리로 가기 직전, 컨디션을 5병이나 마셨다. 회식 장소는 갈비집이었는데, 고기가 전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배가 부른 상태로 회식 장소에 도착했고(새벽 2시이니 당연히 배가 안 고프기도 했다), 의리주와 삼배주 한바퀴를 돌고도 다행히 정신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회식의 시작이었다.
오늘 포스터를 찍었으니 한 잔, 제작 보고회를 진행했으니 한 잔, 인터뷰를 했으니 한 잔, 시사회를 했으니 한 잔, 무대 인사를 했으니 한 잔, 개봉했으니 한 잔. 모든 행사가 진행되고 나면 당연하게 뒤풀이가 있었고 그 술자리는 대부분 새벽까지 이어졌다. 7년간 회사를 다니며 정말 회식 자리만 수백 번 다닌 것 같다.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힘든 술자리는 VIP 시사회 뒤풀이였다.
VIP 시사회란 개봉이 임박했을 때 업계 관계자 및 지인들을 초청하는 시사회다. 포털에 기사로 연예인들이 시사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오는 그 행사다. 진짜 친한 지인이나 가족을 초대하기도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을 초대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영업의 장으로 활용하기도 하는 게 메인인 행사다. 그러나 문제는 시사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풀이까지 그 자리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영화를 본 감상을 듣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고, 그간의 고마움을 표현하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하고, 각자 영업을 하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 자리가 굳이 새벽 4시, 5시까지 이어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 시간이면 아무도 제정신이 아니고 누가 한 말인지 제대로 기억도 못 할 텐데.
VIP 뒤풀이는 마케팅 담당자가 결제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의 뒤풀이에서 진짜 모든 사람이 갈 때까지 술도 마시지 않은 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새벽 6시 반에 마지막까지 취한 사람들을 보내고 지하 술집에서 나오면 내 온몸이 술 냄새에 찌들어 있었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을 때도 많았다.
때로는 자괴감이 느껴지는 의전
‘이게 뭐 하는 짓인가’가 극에 달할 때는 바로 ‘감독과 배우에게 의전’을 해야 할 때였다. 유독 내가 다닌 회사가 심했는데, 술자리에서 다음 영화에 대한 영업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자리를 완벽하게 감독과 배우의 취향에 맞춰 준비해야 했다. 때로는 ‘이 정도는 원활한 일의 진행을 위해 필요하지’라고 하는 것들이었고 대부분은 ‘꼭 이렇게까지 준비해야 하나’ 하는 것들이었다.
유독 한 종류의 맥주만 마시던 배우가 있었다. 하필 그날 가기로 한 술집에 그 맥주가 없어서 아이스박스를 술집에 미리 가져다 놓고, 편의점에서 그 맥주를 사와 아이스박스에 채워 놓은 적도 있다. 심지어 많이 마시기까지 해서 중간에 맥주가 떨어지면, 다시 나가서 사 와서 채웠다.
한 종류면 그나마 편했다. 배우 1은 와인을, 배우 2는 위스키를, 배우 3은 맥주를 좋아해서 3가지를 모두 다 보틀샵에서 사 와서 세팅해야 할 때도 있었다. 회사에서 인터뷰나 행사가 있으면 회의실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신입사원이 첫 출근 한 날 치킨 3마리와 맥주를 포장해오도록 시킨 적도 있었다. 첫 출근용 각 잡은 정장에 훈제향을 가득 품고 돌아간 그 아이의 집에서 부모님은 뭐라고 하셨을까?
‘이렇게 까지 해야 한다고?’ 싶겠지만 해야 했다. 나도 언제나 이해하지 못했고 불만이 가득했지만 도비는 힘이 없고 아무리 불만을 표해도 회사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나마 서울에서 벌어지는 회식은 자주 가는 곳들이 있어서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로 전화만 해도 해결될 때도 많았다. 하지만 무대 인사처럼 움직이는 동선이나 지방에서 회식 장소를 찾아야 할 때는 정말 막막했다.
특히 무대 인사는 여러 명이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다 보니 점심 식사와 간식의 종류와 타이밍이 중요했다. 하루 종일 극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제때 먹을 수도 있고 못 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내 상사와 배우들은 아니었다. 무대 인사 동선표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식사하고 넘어가는 타이밍이었고, 도시락의 종류였으며, 간식이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극장 동선 체크하고, 차 막히는 시간을 고려해서 넘어가고 무대 인사 때 진행할 선물들을 준비하고 큐시트를 정리하는 와중에 간식이 들어갈 타이밍도 고려해야 했다.
무대인사 버스는 뒷 편을 개조해서 배우와 감독, 팀장 이상 급은 뒷좌석에 테이블을 놓고 있었는데 거기서 배우가 한마디 하면 바로 실무인 나에게 카톡이 날아왔다.
[재완 씨, 지금 선배님 과일 먹고 싶다는데 어디 살 만한 데 없나?]
과일 메뉴가 먹고 싶다는 배우의 한마디에 나는 무대인사 중간에 나가서 마트를 찾아가서, 포도를 사고, 화장실에서 씻어서 대접했다. 어디 극장의 무슨 메뉴가 맛있더라, 대구 무슨 극장 근처 떡볶이집이 맛있다더라 등. 메뉴는 많고 다양했고, 널리 널리 퍼져 있었다. 매니저들과 경호팀까지 다 합치면 매번 간식을 60인분 정도 사야 했고 그 간식들을 다 사서 양 팔에 끼고 오면 마치 헬스장에서 운동한 듯 근육이 빵빵해져 있었다.
물론 모든 배우가 그런 것은 아니기도 하고, 유독 내가 다닌 회사가 다른 회사에 비해 의전 문화가 심하기도 했다. 그걸 영업력이라고 생각하는 회사였으니까.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큰 영업력을 발휘했는지는 내 눈앞에서 펼쳐진 건 아니라서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간식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양팔 가득 채워 버스 뒷자리에 세팅을 하고, 또 다 먹은 것들을 치우다 보면 ‘이게 영화 마케팅이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