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시간도 광고 집행도 모든 게 새로운 예능 현장

글ㅣ재완 방송국 마케터

촬영 시간도 광고 집행도 모든 게 새로운 예능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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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티클은 <현직자가 말하는 찐 직무 이야기: 마케팅 편> 시리즈의 6화입니다. 


✍ 오늘의 아티클
  • 예능 마케팅은 드라마에 비해 역사가 짧고, 예산은 더 적습니다. 예능인은 배우보다 바쁘기에 마케팅을 위한 콘텐츠를 촬영할 시간이 부족하고요. 
  • 콘텐츠를 좋아해도 콘텐츠 산업에서 일하는 건 또 다른 일일 수 있습니다. 필자 역시 좋아하는 일을 '일'로 대하고 나서부터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고 해요. 
  • 콘텐츠 산업의 매력은 내가 만든 콘텐츠를 사람들이 즐겁게 소비한다는 거예요. 또,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이고요.

첫 이직 날의 기억 


방송국 첫 이직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색하게 인사하며 들어와 자리에 앉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인수인계를 받자마자 3건의 회의를 연달아 참석했다. 심지어 당장 눈앞에 닥친 촬영이 4건이었고, 연차가 높은 상태에서 이직했기에 내가 전부 메인으로 참여해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건들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일은 어렵지 않았다. 원래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기존에 하던 일보다 프로그램 당 업무 자체는 줄어들었기에 동시에 진행하더라도 힘들지 않았다. 다만 편성에 맞춰 빠르게 흘러가는 속도와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다. 

특히 예능 현장에 처음 갔을 땐 정말 당황스러웠다. 드라마에 비해 예능은 ‘마케팅’이 접목된 역사가 짧고, 예산은 더 적으며 예능인들이 배우보다 더 바쁘기 때문에 마케팅 콘텐츠를 찍기 위한 시간을 빼는 건 불가능했다. 대부분 본 프로그램 촬영 날 틈새 시간에 끼어 들어가서 찍기 때문에 제대로 된 스튜디오도 없이 도둑 촬영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방송국 스튜디오 촬영 


나의 첫 예능 포스터 촬영은 방송국 스튜디오 촬영이었다. 방송국이 자체 보유한 스튜디오는 매주 여러 개의 예능을 촬영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크고, 여러 개의 방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통은 본 프로그램 촬영을 하는 스튜디오 옆 공간을 추가 대관해서 찍거나 하는데, 그날따라 스튜디오가 풀부킹인 상황이었다. 대기실까지 꽉 차 빈 공간이 하나도 없었지만, 스케줄 상 포스터 촬영을 그날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결국 제작진이 1층 로비 대기 공간에 가림막을 설치해 주었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 한가운데에서 포스터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늘 제대로 된 스튜디오에서만 촬영했던 나였기에, 이 막무가내식 촬영 진행은 좀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배우들이라면 ‘절대 불가하다’ ‘현장이 이게 뭐냐’며 소리를 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컨디션이라 너무 걱정스럽기도 했다. 솔직히 출연진들이 무슨 히스테리를 부릴까 걱정했지만, 예상외로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예능 출연진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건지 카메라를 들자마자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고 촬영은 한 사람당 5분 안에 끝났다. 그렇다, 예능 촬영은 대체로 5분이면 끝난다. 그것 역시 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10분 내 촬영을 끝내는 프로 예능인의 자세 


그동안 포스터 촬영은 하루 종일 촬영을 한다는 걸 전제로 하고 스케줄을 잡았는데 (저녁 회식까지 포함!) 예능 포스터 촬영은 본 프로그램 촬영 중간에 끼어 들어가는 것이 문제지,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세팅, 촬영 모두 10분이면 끝났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컨셉츄얼한 촬영이라기보단 출연진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게 대부분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예능인들이 정말 ‘프로’라서이기도 하다. 

“자, 카메라 슛 들어갑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포즈 수십 개가 쏟아져 나온다. 찰칵 소리 한 번에 포즈 하나, 찰칵 소리 두 번에 포즈 2개가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웃으면서, 찡그리면서, 화내면서, 신나게, 힘차게, 그 어떤 요구에도 프로 예능인들은 포즈를 맞춰낸다. 배우들의 예민함만 보다가 환하게 웃으면서 촬영하는 그들을 보며 정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날의 촬영은 수월한 편이었다. 가림막이라도 설치하고 촬영했으니. 가림막도 없이 복도에서 촬영한 적도 있고, 심할 때는 주차장에서 촬영한 적도 있다. 요즘은 차량 통제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시기라, 주차장에서 촬영하다가 주차하러 들어오는 차가 있으면 빠져서 대기하고 다시 찍으러 들어갈 땐 조금 서럽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날 촬영한 예능인들도 그 상황을 이해해 주어 웃으면서 촬영이 끝났다는 점이랄까. 

그리고 예능은 드라마에 비해 예산이 적어 광고를 별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작은 것에 감동하기도 한다. 예능 쪽에서는 이름만 대도 모두 아는 유명 PD에게 광고 관련해 협조 요청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광고를 집행하는 것이 소원이었다며, 그 매체에 자신의 프로그램이 걸릴 모습이 너무 기대된다고 말했고, 광고에도 적극 협조해 줬다. 당연한 말이지만, 빈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는 사람들은 나 역시도 더 고맙고, 더 잘해주고 싶고, 조금이라도 어떻게든 더 뭔가를 노출해 주고 싶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저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굉장히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까칠하다. 


비슷하지만 다른 영화와 드라마  


드라마 현장은 영화와 크게 차이는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영화 일이 줄어들면서 많은 영화 마케팅 스텝들이 드라마 현장으로 넘어오기도 했고, 드라마도 다 사전제작 시스템이라 다를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여기서는 별로 당황할 일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새로운 사건은 늘 일어났다. 

매니지먼트사 사이의 묘한 기싸움 
영화 투자배급사를 다닐 때 나의 소원은 ‘젊고 잘생긴 배우랑 일해보고 싶다’였고, 드라마 쪽으로 옮기고 나서는 실컷 보고 있다. 로맨틱 코미디, 멜로물이 많은 드라마의 특성상 젊은 배우들이 여러 명 나오는 포스터를 종종 찍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매니지먼트 사이의 묘한 기싸움이 있다. 

로맨스 드라마일수록 배우가 예쁘고 잘생기게 나오는 것이 중요하기에 매니지먼트는 ‘내 배우가 왼쪽 얼굴이 예쁜데 오른쪽에 서지 않는지’까지 체크한다. (드라마 포스터의 콘셉트나 구도와 상관없이) 실제로 포스터 상에 배우 얼굴 크기의 mm까지 체크하는 경우는 영화 때부터 많이 봤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는 뭐, 충분히 괜찮았다. 


더 편한 대기실을 확보하려는 매니지먼트
대기실 이슈는 늘 있었다. 대기실 수가 넉넉한 스튜디오도 별로 없고, 야외 촬영처럼 대기실이 아예 없는 곳은 분장차를 빌리게 되는데 분장차 비용이 꽤 비싸다. 촬영 비용을 절감하고자 하는 마케터와 내 배우를 위해 넓고 편한 대기실을 확보하고자 하는 매니지먼트의 기싸움도 늘 있는 일이다. 동성 배우면 대기실을 같이 쓰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누구랑 누구는 사이가 안 좋아서 같이 쓸 수 없다’  ‘누구는 옷 갈아입는 속도가 느려서 같이 쓸 수 없다’ 하는 등의 이유를 대며 추가 대기실을 요구할 때면 나는 ‘참을 인’자 3번을 천천히 쓰곤 했다. 

대기실 이슈가 끝나면 인원 이슈가 생긴다. 촬영 스튜디오는 대부분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전에 인원 체크를 하고 도시락을 미리 주문한다. 보통 디자인사, 포토그래퍼, 조명팀, 소품팀 등을 합쳐서 15명 내외 정도가 움직이고, 거기에 방송국 마케팅팀과 영상 콘텐츠 촬영팀이 붙으면 25명 정도가 되고, 마지막으로 배우와 매니지먼트 인원 체크를 한다. 

“A 매니지먼트에서 12명이요?“ 

배우 1명이 오는데 A 매니지먼트에서 12명이 오겠다고 한 것이다. 심지어 그날은 야외 촬영이라 구경하는 사람들이나 다른 컨트롤이 어려워 최소 인원만 와 달라고 했건만. 줄여달라고 요청해 봤지만 인원을 절대 줄일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심지어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B 매니지먼트에서도 12명이, C 매니지먼트에서는 15명이, D 매니지먼트에서는 16명이 온다는 말을 전해 왔다. 

결국 포스터 촬영 스텝이 25명인데 배우 제외하고 매니지먼트에서만 55명이 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 리스트를 받고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혹시 매니지먼트가 이게 포스터 촬영이 아니라 소풍이라고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는 대체 배우 1명이 오는데 16명이 붙어서 뭘 해줄 생각인 걸까’란 고민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단 한 명도 줄이지 못했다. 매니지먼트끼리 ‘너네가 줄여라, 우린 못 줄인다’ 하며 기싸움을 하다 처음 인원 그대로 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다른 드라마 촬영에서도 매번 11명, 16명, 17명씩 매니지먼트들이 와서 이제는 아예 포기해 버렸다. 그냥 문제만 안 일으키길 간절히 바라면서. 


성형외과 의사가 된 듯한 사진 보정  


이 일을 하면서 가장 궁금한 것 중에 하나가 ‘매니지먼트에서 보는 눈은 왜 내 눈과 다른가’다. 내가 봤을 땐 정말 모든 컷이 다 예쁘고, 잘생기고, 멋있는데 매니지먼트의 눈에는 아니라고 한다. 이 컷은 이게 마음에 안 들고, 저 컷은 저게 마음에 안 들고 포스터 콘셉트와 상관없이 매니지먼트에서 컷을 골라내기 시작하면 쓸 수 있는 컷은 1장만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1컷마저도 보정 요청이 엄청나다. 이는 드라마, 예능, 영화 상관없이 점점 더 심해지는 추세다. 

포스터 보정 요청은 주로 사진에 빨간색으로 표시돼 오는데, 마치 성형외과에서 수술 전에 얼굴에 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눈가 주름, 동공 크기, 쌍꺼풀 라인, 머리숱, 팔자주름, 모공 크기, 팔뚝 굵기, 턱 라인, 허리라인, 바지 주름 등 상상도 못하는 곳까지 보정 요청이 온다. 심지어 어떤 아이돌 매니지먼트는 이 사진에서 눈, 이 사진에서 턱, 이 사진에서 어깨를 합성해 달라며 요청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각 사진에서 뽑아서 합성을 할 정도면 이 사람을 찍은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의 보정이었다. 무엇보다 그게 내 눈엔 다 비슷비슷해 보여서 어떤 게 최종본인지 헷갈릴 정도라는 게 문제이기도 하고. 

물론 모든 배우가, 모든 아이돌이 그런다는 것은 아니다. 예능인의 경우 거의 보정 요청이 없고 (사랑해요, 프로 예능인!) 탑 배우, 탑 아이돌 중에서도 보정을 안 하는 사람들도 있다. ‘보정 요청은 없습니다.’라는 메일 회신이 오면 나는 사심 가득 담아 그 사람의 팬이 된다. 작년엔 정말 많은 출연진들이 보정 요청을 해서 거의 성형외과 의사가 된 기분이었는데, 올해 담당들은 다 대배우들만 포진해 대부분 보정 요청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이 업계에서 너무 드문 일이기 때문에 주변 마케터들의 믿을 수 없다는 시기 어린 질투도 많이 받았다.  


퇴사 후엔 전화하지 마세요! 



“재완아, 너 이직한 데선 뭐 하니?” 

“아, 포스터 만들고, 예고편 만들고, 광고 부킹하고 그래.”

“뭐야, AE랑 똑같은 일 하네?” 


새로운 회사로 이직을 한 후, 오랜만에 연락을 받은 광고대행사 선배가 한 말이었다. 막상 말하고 보니 그랬다. 포스터 만드는 건 지면 광고였고, 예고편 만드는 건 영상 광고였으며, 그렇게 만든 소재들을 어디에 얼마나 틀지 광고 부킹하는 건 비슷했으니까. 제품이 콘텐츠가 됐을 뿐 결국 하는 일은 똑같았다. 광고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방송으로 점점 다른 업계로 이직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니!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렇게 아티클 6편 내내 회사와 일 욕을 했지만, 그래도 이 일을 좋아해서 그런 건지 여전히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광고, 영화, 방송 중에 어느 게 제일 나아?“ 

회사 이력을 말하면 종종 받는 질문이다. 하지만 3가지 일이 모두 장단점이 뚜렷해서 어느 하나가 가장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광고 회사에서 일을 배웠기에 마케팅 기초를 탄탄히 하고, 스케줄링을 꼼꼼하게 잘할 수 있게 됐고, 영화 투자배급사에서 일하며 콘텐츠 마케팅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익힐 수 있었다. 지금 방송국에서는 드라마, 예능뿐만 아니라 스포츠, 명절 같은 시즈널 콘텐츠들까지 함께 다루며 콘텐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좋아하는 게 일이 된다는 것


이 업계들로 취업 혹은 이직을 생각하는 분이라면 뻔한 말이지만 ‘좋아하는 것을 일로 만났을 때’를 좀 더 고민해 보라고 하고 싶다. 나는 영화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지만, TV는 정말 좋아한다. 굳이 보지 않아도 TV는 늘 틀어놓고 소리 나게 해놓고 있으며, 특히 즐겁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예능을 좋아한다. 회사에서 머리 쓰고 지쳐서 집에 왔을 때 예능을 틀어놓고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웃으며 볼 수 있는 점이 좋아서다. 하지만 ‘일’로서 대하고 나서부터는 즐길 수 없게 됐다. 

광고를 할 때도 영화를 할 때도 ‘어떻게 하다 저런 광고가 나왔을까’ ‘저 배우 진짜 예민하고 힘든데, 현장 진짜 힘들었겠다’ 등등의 생각을 하며 보다 보니 몰입이 안 됐다. 방송국으로 이직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저 예능은 저런 케미로 시청률이 잘 나오는구나’ ‘저 드라마는 편성시간을 왜 저렇게 했을까’ 등등 예전처럼 편하게 보지 못하게 됐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취업, 이직을 고민해 보셨으면 한다. 

6편의 글을 쓰는 동안, 장점보다 일의 단점을 많이 써서 취업과 이직하는 분들께 도움이 됐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좀 더 현실적으로 일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고민했으면 하는 마음에 그렇게 썼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많이 순화해서 적은 것이며 진짜 심한 일은 쓰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도 콘텐츠 업계로 들어오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내가 만든 콘텐츠를 사람들이 즐겁게 소비하는 일을 보는 건 꽤나 즐겁고 보람된 일이고,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이라는 건 확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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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ㅣ재완 (https://brunch.co.kr/@karuni)
일주일에 110시간씩 일하던 광고대행사를 거쳐, 새벽 6시까지 배우, 감독과 술을 먹어야 했던 영화 투자배급사를 지나, 현재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7개를 담당하며 방송국에서 일한다. 늘 전화에 시달렸던 기억을 살려 에세이 <퇴근 후엔 전화하지마세요> 를 출간했다. 광고, 영화, 방송일을 하고 있지만 보는 것보다 손으로 만들거나 하는 걸 더 좋아한다. 


발행일 2023.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