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티클은 <그 디자이너가 바라본 세상> 시리즈의 3화입니다. 그래픽 디자이너에서 브랜딩 디자이너로, 또다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변신을 시도한 송호성 디자이너. 그는 여러 영역을 오가는 과정이 불안하기보다 즐거웠다고 말한다. 언젠가 나만의 브랜드를 가지고 싶다는 그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어 왔을까. 
우리는 꼭
한 우물만 파야 하나요?
Q. 지금은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무신사의 한 파트를 리드하고 계시지만, 커리어의 시작은 타이포브랜딩 기업으로 잘 알려진 ‘윤디자인’이에요. 언제부터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A. 대학생 때부터 미세한 획의 차이로 완전히 다른 글자가 되는 타이포그래피에 매력을 느꼈어요. 비전공자들이 비슷하다고 말하는 폰트도 사실 디자이너의 눈에는 명확히 구분돼 보이거든요. 윤디자인에서는 다양한 기업의 서체를 만들었는데요. 기업이 한 가지 서체를 지속해 사용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사람들이 서체만 봐도 어떤 기업인지 떠올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됐어요. 제가 만든 서체가 기업의 브랜딩에 큰 역할을 한다는 걸 깨달았고, 자연스럽게 브랜드 디자인까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네이버 브랜드 디자이너로 이직하게 됐어요.
Q. 넓게 보면 ‘디자인’ 영역이긴 하지만, 브랜드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픽 디자인은 필요한 역량도 스킬도 다를 것 같아요. 3년간 쌓아온 타이포그래픽 디자인 경력을 뒤로하고,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다시 시작한다는 게 두렵진 않으셨나요?
A. 남들보다 새로운 도전에 부담을 덜 느끼는 편이에요. 설령 저의 도전이 헛수고가 된다고 해도 아직은 젊으니 괜찮을 거라 믿었고요(웃음). 남들보다 몇 년 출발이 늦어져도 새로운 직무를 경험해 보는 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 될 테니까요.
Q. 브랜드 디자이너로 들어간 네이버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역할까지 맡게 됐어요.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 하는 일이 버거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호성 님은 어떠셨나요?
A. 그 당시 네이버는 BX와 UX 조직이 함께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랜딩이 아닌 일을 맡는 게 특별한 건 아니었어요. 게다가 프로덕트 디자인 영역을 다루는 건 스트레스라기 보다 즐거움으로 다가왔고요. 제가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을 하며 느낀 건 브랜딩과 프로덕트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거예요. 브랜드 디자이너가 오랜 시간 고민해 새로운 로고와 네이밍을 세상에 내놓는다고 해도, 프로덕트가 불편하면 멋진 디자인이 돋보일 수 없어요. 결국 본질인 프로덕트가 좋아야 소비자의 브랜드 경험도 좋아질 수 있는 거죠. 브랜딩을 하며 프로덕트 개선에 대한 욕심이 자연스럽게 생겼고, 반영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지금은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브랜딩에도 관심이 높습니다.

Q. 네이버에서 8년, 계열사인 네이버웹툰과 네이버랩스에서 3년간 근무하셨어요. IT 서비스부터 콘텐츠와 AI까지, 다양한 도메인을 아우를 수 있었던 호성 님의 비결이 궁금해요. A. 무엇이든 공부를 많이 해야만 해요(웃음). 네이버웹툰에 있을 땐 콘텐츠 산업이 가진 특징을 이해하는 게 중요했어요. 산업의 트렌드와 이슈를 파악하며 이해도를 높인 뒤, 모바일 환경에서 웹툰을 보는 유저가 조금이라도 더 편리하게 볼 수 있도록 최적화된 디자인을 고민했죠. 그런데 네이버랩스에서 인공지능 번역 서비스인 ‘파파고’를 담당하게 됐을 때는 개발 박사 분들과 협업해야 했고, 소통을 위해서는 제품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어요. 그분들은 기술 전문 용어를 사용하며 말씀하시기 때문에 처음 회의에 들어갔을 땐 회의 내용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퇴근 후 기술 스터디도 하고, 논문도 읽으며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해 나갔어요. 이처럼 도메인 별로 서비스의 지향점도, 사용자의 행태도 달라져요. 해당 산업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알게 되는 영역이 커지면서 확실히 성장한 걸 느끼게 돼요.Q. 다양한 도메인에서 여러 직무를 오가며 일한다는 건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의 전문 영역이 흩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A. 경영학 구루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의 저서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보면, “나는 60여 년 이상 3년 내지 4년마다 주제를 바꾸어 공부를 계속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인상 깊게 읽은 문장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 역시 주니어 때는 한 우물을 깊게 파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런데 연차가 쌓인 지금은 여러 우물을 파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러 전문 영역을 가지는 건 충분히 무기가 될 수 있어요. Q. 여러 우물을 판 호성 님의 노력이 업무에 어떻게 도움이 되고 있나요?A. 확실히 업무를 보는 시야가 넓어졌어요.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지 간에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일하기 때문에 상대를 이해하는 건 정말 중요한 부분이에요. 특히 의견이 뚜렷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이견이 생기면서 합의가 어려워지는데요. 여러 우물을 파본 사람이라면 다양한 영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 때문에 ‘저 사람은 이런 이유 때문에 저렇게 말하는구나.’라며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돼요. 상대의 주장을 어디까지 수용하고, 나는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을지 판단이 쉬워지죠. 
시니어 디자이너가 되면
어떤 게 달라질까?
Q. 주니어 시절, 호성 님이 디자이너로서 가졌던 고민은 무엇인가요?
A. 주니어 때는 경험이 부족해서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어요. 연차가 쌓이고 여러 프로젝트를 경험하면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 위주로 작업하다 보니 그 경계도 뚜렷해지기 시작했죠.
지금의 저는 제가 AI나 증강현실 같은 기술 프로덕트보다 라이프스타일 서비스에 관심이 많다는 걸 잘 알아요. 잘 하기도 하고요(웃음). 내가 어떤 걸 잘하는지 명확히 알고 나면, 협업하는 주변 동료 역시 제 강점을 알게 돼요. 그러면 저에게 맡겨지는 일도 저와 어울리는 일로 바뀌더라고요.
Q. 그렇다면 22년 차가 된 지금은 어떤 고민을 하나요?
A. 요즘 생성형 AI가 주목받는 만큼, 관련 산업으로 이직하는 주변 디자이너를 종종 마주합니다. 그런데 기술 분야는 제가 잘 알거나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에요. 지금 다니는 회사는 패션 플랫폼으로 신기술을 빠르게 도입해야만 하는 곳은 아니라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런 변화를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반영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Q. 연차가 쌓이면 중요해지는 스킬셋도 달라질 텐데요. 주니어 디자이너와 시니어 디자이너를 가르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면 프로젝트의 완결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획 의도가 사용자에게 잘 전달됐는지 세심하게 확인해야 해요. 이런 기본 역량이 완성됐다면 어느 정도 경력이 쌓였을 텐데요. 이때부터는 소프트 스킬도 신경 써야 해요. 시니어가 되면 리더로서 팀을 이끌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중요하거든요.
Q.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과 유저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이 다를 때도 있을 것 같아요. 때론 회사가 추구하는 디자인 방향성에 공감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 같고요. 이럴 때 디자이너는 어떤 디자인을 추구해 나가면 좋을까요?
A. 주니어 시절의 저는 담당한 프로젝트의 디자인 퀄리티를 높이는 데만 집중했어요. 그러다 9년 차가 됐을 무렵, 디자인 퀄리티를 높이는 일보다 브랜드에 맞는 디자인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죠. 저의 취향이 담긴 디자인 결과물들은 멋진 포트폴리오의 한 면이 될 수는 있었지만, 유저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어요. 비즈니스를 위한 디자인은 유저의 니즈를 만족시키는 디자인이어야 하고, 그게 곧 라이트 디자인(Right design)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인 취향이 아닌 회사의 비즈니스 전략에 맞는 디자인을 고민해 구현하면서 칸 국제광고제(Cannes Lions), 레드닷(RedDot), IF Design 같이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에서 여러 번 수상하며 인정을 받기 시작했거든요. 이때부터 어떤 디자인을 해야 하는지 확신을 갖게 됐어요.

오래 다니고 싶은 회사를 찾으려면
Q. 네이버를 퇴사한 이후 포잉, 런드리고, 무신사와 같은 스타트업에서만 근무하고 계세요. 안정적인 대기업을 나와 스타트업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A. 제가 입사할 당시 네이버는 지금과 달리 포털 사이트 1등을 두고 여러 경쟁사와 다툴 때였어요. 한창 성장할 때라 조직 개편도 많았고, 수많은 서비스가 생기고 사라지며 매일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죠. 그렇게 11년간 일하다 보니 어느새 네이버는 국민 포털이 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저 역시 디자인 조직의 리더가 되면서 디자이너로서 큰 성장을 하게 됐지만, 변화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대기업의 환경에 아쉬움을 느끼게 됐어요. 일부러 네이버웹툰이나 네이버랩스와 같이 전혀 모르는 산업으로 가는 도전도 해봤지만,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았죠. 그런데 시기적절하게, 관심 있는 F&B 산업의 스타트업 ‘포잉’에서 일할 기회가 왔고, 그때가 스타트업 열풍이 부는 시기기도 해서 도전하게 됐어요.
Q. 호성 님께서 회사를 선택하시는 기준도 궁금합니다.
A. 제가 다닌 레스토랑 예약 플랫폼 ‘포잉’, 세탁 서비스 플랫폼 ‘런드리고’,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모두 라이프스타일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저는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서비스에 관심이 많거든요. 덕업일치할 수 있는 회사를 골라야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럼에도 일이 많으면 가끔 지치긴 하겠지만 다른 일보다는 수월하지 않을까요?

Q. 성신여대와 한양대에서 겸임 교수로 강의를 하셨어요. 브랜드비즈 컨퍼런스, DDC 2023 등 다양한 컨퍼런스에서도 강연을 해오셨고요.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무엇이고, 어떻게 조언해 주시는지 궁금합니다. A. 학부생이나 주니어 디자이너들은 주로 취업이나 이직 관련 질문을 해요. 어떤 회사를 가야 하는지, 커리어는 어떻게 쌓아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이죠. 그럼 저는 “기회가 된다면 취업 말고 창업을 해 보세요.”라고 답변합니다. 대기업을 나온 이후 여러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DNA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자금 조달 문제부터 인사 노무 이슈로 스트레스 받을 일이 자주 생기는데, 그때마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이성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창업자들을 보며 자주 놀랐거든요. 창업자들이 가진 단단한 멘탈과 강한 결단력을 이른 나이에 배울 수 있다면, 나중에 어떤 회사에 들어가도 잘 적응할 수 있고, 높은 성과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