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진주
‘마케팅의 정석’은 없다
권진주 실장은 제주맥주에 합류하기 전, 해태음료와 맥도날드 마케터로 일했다. 행보로 톺아보면 미리 철저히 준비되어 있던 마케터였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연극에 열광하던 예술인 중 한 명이었다. 관객을 맞던 그는 어떤 계기로 또 다른 갈래길에 들어선 걸까.
연극을 하셨다니 놀랐어요. 마케터로 전향한 이유를 들려 주세요.
연극으로 생계유지를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했어요. 연극 배우가 되는 일도 진지하게 고려했었죠. 어떻게 하면 돈을 벌면서 예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다 마케팅이 떠오른 거예요. 마케팅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상업적인 종합예술이라고 판단했어요. 대학교 전공은 경영학이에요. 사실 연극 만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고, 토익 점수도 없었어요. 마케팅과 관련한 대외활동이나 경험 또한 부족했죠. 그렇게 마케팅 커리어를 시작했답니다.
해태음료가 마케터로 일한 첫 번째 직장이에요. 인턴으로 시작하다 정규직으로 전환되었어요. 인턴도 꼴찌로 입사했어요. 처음엔 불합격 통보를 받았는데, 제 앞에 한 명이 최종 입사를 포기하면서 채용되었죠. 그날 이후 여기서 살아 남아야 한다고 마음을 강하게 먹었어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마케터 배경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거라고 느꼈어요.
해태음료를 거쳐 하이트진로 프리미엄 맥주를 만드는 팀에 합류하셨죠. 지난한 노력이 있었을 텐데요. 그 과정에서 고비는 없었나요?
늘 고비입니다.(웃음) 보통 마케팅은 트렌드에 민감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다양한 것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런데 저는 취향이 확고하고 모든 것을 가볍게 경험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는 편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마케터와 동떨어진 성향을 갖고 있어요. 이런 점이 챌린지로 올 때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브랜드 제품을 사고 경험하며 브랜드 마케팅에 적용해 보라는 상사의 지시를 받기도 했었죠. 저는 그 방식에 공감하지 못했어요. 내가 마케터로서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 순간이었어요.
커리어에 대한 의문을 떨치기 위해 제가 생각하는 좋은 브랜드 마케팅을 펼칠 수 있는 산업군을 선택했어요. 맥도날드에서 하이트진로로 직장을 옮긴 이유도, 바로 ‘술’이라는 제품을 해보고 싶어서였어요. 하이트진로에서 새로운 프리미엄 수입 맥주를 런칭하며 크래프트 맥주에 관심이 생겼죠. 이 관심이 조금씩 깊어지고 자연스레 맥주 산업에 발을 넓힌 하나의 계기가 되었어요. ‘내가 이 산업군에서 일을 잘 할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이 들 때 과감하게 뛰어 들었고 의문과 고비를 넘겨 왔습니다.
늘 고비라고 말씀주셨는데, 성과 측면에서도 압박을 받는 편인가요?
자주 받아요. 하지만, 그 압박이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마케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유형의 실체를 만드는 제작자라고 생각해요. 나의 제작물이 누군가에게 반응을 얻고, 그 안에서 피드백을 받는 일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물론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희열을 느낄 수 있어야 하죠.
성과가 곧 시장의 지표고 나에게 주는 피드백이에요. 만약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나 회사가 피드백을 전혀 주지 않는다면, 내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깨닫기 힘들 거예요.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죠. 마찬가지로, 내가 빚은 마케팅 성과나 실적이 성적표의 개념이 아니라, 성장하기 위한 지표 혹은 피드백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 권진주
정형화된 맥주 시장을 깨트리다
크래프트 맥주에 눈을 뜬 권진주 실장은 맥주 전문 매거진 <비어포스트(BEERPOST)>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분주히 국내외 맥주 행사를 오다녔고, 뉴욕 대표 맥주 브랜드 ‘브루클린 브루어리(Brooklyn Brewery)’ 본사와의 인연으로 제주맥주 문혁기 대표를 처음 만났다. ‘한국 맥주 시장의 판을 뒤집어 보자’ 그가 문혁기 대표와 손을 잡게 한 꿈의 문장이었다.
제주맥주가 가진 어떤 가치 혹은 방향성에서 이직을 최종 결정하셨나요?
맥주 시장에 대한 대표님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 공감했기 때문이에요. 회사는 일을 통해 다 같이 결과를 만들어 가는 곳이잖아요. 내가 일을 더욱 잘 할 수 있게 하는 조직문화는 물론,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의미 있는 결과를 내는 방식이 회사를 결정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이곳에 합류하기 전, 다양한 크래프트 회사에서 오퍼를 받았어요. 그런데 저희 대표님이 말씀주신 꿈의 크기, 그와 관련해 떠오르는 여러 단상이 저와 제일 결이 비슷했어요. (대표님 꿈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집니다.) ‘한국 맥주 시장의 판을 뒤집어 버리겠다!’ (일동 웃음)
많은 사람이 크래프트 맥주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해요. 만들고 싶은 맥주를 장인 또는 예술가의 관점으로 이야기하곤 하죠. 반대로, 대표님은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나라 제조업이 전 세계에서 각광받고 있는데, 유일하게 맥주만 자국민에게조차 인정 못 받는 현실이 이해 안 된다고 말이죠. 우리가 능력을 키우고 시장을 충분히 바꿀 수 있다며 마켓 관점으로 저를 설득하셨어요. 마켓 관점으로 맥주 시장을 다시 보니 하고 싶은 반짝이는 일들이 절로 떠올랐어요. 저에게 ‘기존의 정형화된 맥주 시장을 깨트리는 것’ 이것만으로도 세상이 한 스푼이라도 좋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념을 가지고 일할 수 있어요.
‘1초에 한 병씩 팔리는 맥주’ ‘수제 맥주 시장 점유율 30퍼센트’ 등 제주맥주를 소개하는 수식어만 봐도, 요즘 정말 트렌디한 주류 브랜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주맥주만의 브랜드 마케팅 전략이 궁금합니다.
혹시 책 <슈독(Shoe Dog> 읽어 보셨나요?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Phil Knight)’가 쓴 자서전이에요. 나이키가 세상에 나올 당시 운동화 시장이 크지 않았어요. 꽤 니치한 시장이었죠. 그는 운동선수들이 있는 장소를 찾아 그들의 대화를 토대로 운동화를 만드는 데 전념했어요. 나이키 성장이 정점을 찍은 이후, 데스밸리(Death Valley)를 겪을 때 그는 또 한 번의 도약을 골몰했어요. 이내 고객군으로 들어왔으나 놓치고 떠나 보낸 잠재 고객이 적지 않다는 걸 깨달았죠. 이후 그는 다시 현장으로 나가 고객을 만나기 시작했다고 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나이키와 제주맥주 전략이 닮아 있다는 점이었어요. 제주맥주도 고객이 있는 현장에서 직접 교류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프라인 행사도 자주 개최했었어요. 제주맥주 성공 배경에는 현장에서 고객들을 만나 그들이 진짜로 열광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파트너사는 행사에서 저희 마케터들을 보며 놀라곤 해요. 도대체 회사에서 무얼 해주길래 직원들이 이만큼 열성적인 거냐고 묻죠.(웃음) 제주맥주 마케팅팀은 제주와 맥주에 열광해요. 그러니까, 직원들이 곧 고객이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역시 잠재 고객인 거예요. 우리 자체가 고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제주맥주만의 보석 같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죠.
반대로, 브랜딩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업무 패턴이 있을까요?
유행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일이에요. 유행을 마케팅에 풀어 쓸 땐 반드시 브랜드에 맞게 기획해야 합니다. 누가봐도 우리 브랜드 콘텐츠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요. 해야 하는 일이 몰아칠수록 브랜드 색을 입힐 때 ‘색상’ ‘로고’를 조정하는 데 그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일들이 쌓이면 결국 우리의 것이 명확하게 서 있지 못 해요.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 밀도도 점차 약해지죠.
제주맥주는 ‘제주 한 달 살기’라는 프로그램을 시즌제로 운영하고 있어요. ‘한 달 살기’는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여행 방법 중 하나예요. 그래서 우리만의 자산으로 디벨롭하는 일을 중점으로 고민했어요. 예를 들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숙소 이미지를 키 비주얼로 사용할 경우 ‘바다가 있는 다른 지역과 구분할 수 있을까’ 면밀히 진단했어요. 저는 제주가 공간감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특히 들판과 하늘이 공존하는 자연이 도드라져 보였죠. 이 생각을 발전시켜 제주의 공간감을 살리는 이미지를 선별했어요. 제주에 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지역을 구분할 수 있도록 말이죠. 더불어 타 브랜드에서 보여주는 한 달 살기 콘텐츠와는 분명한 차별점을 일구며 진행하고 있어요. 메시지 톤앤매너 등 디테일을 잡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되돌아 봅니다.
제주맥주는 구체적으로 좁은 타깃을 잡는 것이 아닌, ‘제주를 좋아하는 사람 누구나’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제주맥주 마케팅팀은 어떻게 일하고 있나요?
대표적으로 ‘TMI(Too Much Information)’문화가 있어요. 회의 후에 정리하지 못한, 개운하지 않은 것을 주제로 언제든지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눠요. 의견을 덧붙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가기 위해서요. 이때 중요한 건, 누구든지 진실하게 말할 수 있는 문화를 구축해야 해요. 내가 했던 말이 어떤 형태로든 화살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믿음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