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티클은
<현직자가 말하는 찐 직무 이야기: 마케팅 편> 시리즈의 2화입니다.
✍ 오늘의 아티클- 필자는 회사가 재미있었다고 해요. 마치 ‘오늘은 누가 누가 더 이상한 일을 겪었을까’ 대회처럼 이상한 일들이 넘쳐났다고요.
- AE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꼼꼼함’이라고 합니다. 많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돌아가고, 특히 막내 AE는 스케줄, 비용, 파일 등을 다 잘 챙겨야 하기 때문에 꼼꼼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죠.
- 또한, 작은 수정부터 아예 틀을 바꿔버리는 수정까지, 수정의 한계는 없기에 지나간 파일들을 절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앞선 에피소드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재미있는 일을 찾아 광고 회사를 들어갔고, 실제로 광고 회사에서의 일은 재밌었다. 새로운 제품을 맡으면 새로운 지식과 세계를 알게 되는 것도 재밌었고, 새벽에 비몽사몽간에 아무 말이나 던지는 아이디어 회의도 재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회사가 재미있었다. 마치 ‘오늘은 누가 누가 더 이상한 일을 겪었을까’ 대회처럼 이상한 일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그런 일은 대체로 바쁠 때 일어난다. 
광고대행사는 주로 이럴 때 바쁘다
일단 연말 연초가 가장 바쁘다. 연초에 신제품을 론칭하거나, 브랜드 PR 광고를 하는 광고주가 많기 때문에 연말은 경쟁 PT가 가장 많은 시즌이다. 11월 정도부터 PT를 준비하고 실제 온에어하는 연초까지 일이 끊이지 않았다.
“재완 씨, 이번 연말 TF야.”
입사 후 처음 소집된 연말 TF. 당연히 경쟁 PT의 TF인 줄 알았는데, 소환되자마자 내가 한 일은 교보문고에 가서 <오즈의 마법사> 동화책을 산 뒤 한 장 한 장 스캔하는 일이었다. 스캔한 후에는 도로시의 얼굴에 광고주 얼굴을 합성했다. 그렇다, 내가 맡은 TF는 연말 광고주와의 송년회 준비 TF였다.
광고주가 광고의 신을 찾아 떠나며 한 명 한 명의 멤버들을 만나는(도로시는 광고주 상무였고, 멤버들은 광고주 팀장이었다.) 이야기는 마지막에 내가 속한 광고대행사 상무님을 만나며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 광고대행사에서 1년 중 가장 바쁜 연말에 나는 광고주 얼굴을 한 장 한 장 동화책에 합성하고, PPT로 슬라이드 쇼를 만들고, 광고주별 맞춤 선물도 다 준비했다. 그리고 이 연말 송년회는 매해 이뤄졌고, 나는 퇴사 전까지 3번 정도 회식 TF를 했었다.
그리고 또 명절 전후로 바쁘다. 가전제품, 건강식품, 생활용품, 화장품 등등 명절에는 모든 제품이 광고를 하고 세트 상품들이 나온다. 간단한 온라인 광고부터 지면광고, TV CF까지 자잘한 일부터 큰 건까지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광고주의 실적을 올려주기 위해서도 바쁘다.
“이거 샴푸 세트 네이버 최저가보다 비싼 거 같은데?”
“참치 세트 지난 추석에 산 것도 아직 남아있는데…”
우리 회사에 무슨 광고주가 있는지 언제 뭘 따왔는지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었는데, 명절이 되면 사내 게시판에 올라오는 명절 세트 덕분에 세세하게 알게 된다. ‘아, 여전히 이 샴푸랑 치약 우리랑 하는구나’ ‘참치랑 스팸도 있네’ ‘아웃도어 제품도 판매하네’ 등 게시판을 둘러보며 주로 동기가 담당하는 제품들을 사게 된다.
“이거 2개씩 할당이다”
아예 구매해야 하는 할당이 내려올 때도 있었다. 생활용품 할당은 그래도 쓰고 사라지는 제품이니까 괜찮았는데, 가전제품 할당이 내려왔을 땐 좀 당황스러웠다. 내가 쓰지도 않을 20만 원짜리 제품을 2개씩이나 사야 하다니, 아무리 을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냐며 울컥했지만 팀장님은 본인은 3개 이상 사야 한다며 더 억울해했다. 결국 나도 더 이상의 할 말을 잃은 채 바로 중고거래 사이트를 접속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새제품들이 갑자기 중고 거래로 우르르르 올라온다면, 할당으로 제품을 산 광고회사 직원들이 내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언제가 바쁘냐면 봄에 바쁘다. 가정의 달, 다른 말로 하면 ‘소비의 달’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 달을 준비하는 광고들이 초봄부터 준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바빠진다. 특히 냉장고, 세탁기, 정수기 등 백색가전 담당이었던 나는 그때가 제일 바쁠 때였다. 가정의 달 행사 광고, 신혼부부 타깃 광고들이 TV CF부터 온/오프라인 지면 광고까지 정말 많았다. 그나마 김치냉장고는 내 담당이 아니라 가을 준비는 안 해도 돼서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가정의 달이 지나가면 여름 휴가철을 맞이한 워터파크와 여행사 광고가 오고, 여름이 지나가면 추석이 되고, 추석이 지나가면 다시 연말이 되고 연말이 지나가면 다시 구정이 오고, 구정이 지나면 다시 봄이 되고. 이 정도가 광고대행사에서는 바쁜 시즌이다.

AE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꼼꼼함’
대체로 사계절이 다 바쁜 AE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꼼꼼함’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돌아가고, 막내 AE는 스케줄, 비용, 파일 등을 다 잘 챙겨야 하기 때문에 꼼꼼함이 가장 중요하다. 나의 첫 사수는 정말 꼼꼼한 스타일이라 비즈니스 메일 쓰는 방법부터 PC 폴더 정리까지 세세하게 가르쳐 줬다.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누가 갑자기 내 PC를 열어 파일을 찾더라도 바로 찾을 수 있을 만큼 폴더와 파일명이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가 그의 지론이었다. 프로젝트별 파일이 섞이면 안 되고, 어떤 순서로 수정되었는지 히스토리도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걸 폴더로 나눠 정리하게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을 받아 나는 지금도 폴더 정리를 강박적으로 많이 하는 편이다.
“지난번인가, 지지난번인가 시안이 더 나은 거 같은데, 지금 볼 수 있나?”
그 폴더 정리가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몇 차례 수정한 광고 시안을 보고하러 간 자리였고, 내 노트북을 프로젝터에 연결해 다 같이 보고 있었다. 광고주 상무님이 갑자기 이전 시안들을 보고 싶다고 하자, 나는 바로 파일을 찾았다. 다만 폴더를 너무 세분화한 탓에 바탕화면에서 회사 업무 폴더로, 광고주별 폴더로, 연도별 폴더로 다시 들어가고, 그중 프로젝트 폴더로 들어가, 또 월별 폴더에서 진행 중과 완결 건 중 진행 중 폴더로 들어가 이전 파일을 찾아야 했다. 클릭만 한참 하고 있자니 광고주 상무님이 한마디 했다.
“재완 씨, 일이 너무 많은 거 아냐?”
수많은 폴더 사이에서 혹시 욕이라도 쓴 파일명이 나올까 봐 긴장해서 클릭하던 나는 그의 말에 민망한 웃음이 터졌고, 주변 사람들도 다 같이 웃음이 터졌다. 그 덕에 보고 분위기는 조금 부드러워졌고, 일이 많은 나를 위해 수정사항도 기존 시안을 조금 변형하는 걸로 마무리됐다. 이 외에도 실제로 연차일 때 다른 사람들이 내 PC에서 예전 보고 파일 등을 찾을 때가 종종 있었고, 그럴 때마다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깔끔한 폴더와 파일 정리는 내가 일할 때도 훨씬 편하다.

아무리 꼼꼼하고 완벽하게 보고해도,
결과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수많은 폴더 정리와 지나간 파일들이 중요한 이유는 광고가 한번 나올 때까지 수정을 정말 많이 하기 때문이다. 아주 자잘한 수정부터 아예 틀을 바꿔버리는 수정까지, 수정의 한계는 없기에 지나간 파일들을 절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빌트인 가전 지면 광고를 할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빌트인 광고는 세팅이 어려워 새로 촬영을 잘 하지 않았다. 예전 광고 사진에 일부만 합성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도 냉장고만 최신 제품으로 합성하는 작업이었다. 1차 시안을 보낸 이후로 이어진 수정들은 아래와 같다.
[1차 수정]
광고주 : 빌트인이라, 새 냉장고가 안 보일 수도 있으니까 냉장고 잘 보이게 두껍게 튀어나오게 만들어 주세요. (나: 그럴 수 있지.)
[2차 수정]
광고주 : 너무 두껍네요. 다시 넣어 주세요.
(나: 그래, 너무 튀어나오게 하긴 했어.)
[3차 수정]
광고주 : 소비자 오인지가 될 거 같아요. 이건 연출 사진이라고 써주세요.
(나: 그래서 튀어나온다는 거야 안 튀어나온다는 거야….)
[4차 수정]
광고주: 냉장고가 왜 여기 있죠?
(나: 뭐 인마?)
돌고 돌아 그냥 원래 사진이 되어버린 이 광고는 결국 취소됐다. 제품이 광고처럼 완벽히 연출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없이 돌고 돌아 ‘맨 처음 게 제일 좋네요’라는 답이 나오는 이런 식의 수정은 사실 허다하다. 대리가 한마디, 과장이 한마디, 팀장이 한마디, 상무가 한마디, 회장이 한마디씩 얹다 보면 어느새 광고는 처음의 모습도 목적도 잃은 채 너덜너덜해져 있고, 그러다 보면 모든 게 명확했던 처음 게 제일 괜찮아 보이는 거다.
한 광고주와 오래 일하다 보면 나중에는 그 성향도 파악해 아예 광고 시안을 잡을 때 팀장용, 상무용, 회장님용 추가 시안을 만들기도 한다. 이상하게 위로 갈수록 디자이너들이 잡는 작고 예쁜 글씨를 마음에 안 들어 하고, 비유가 넘치는 카피를 싫어한다. 하지만 결정권자는 위에 있고, 원치 않는 수정을 하느니 아예 맞춤 광고 시안을 들고 가는 거다. ‘이렇게도 잡아보았습니다만, 요즘 감성은 이쪽이 좀 더 반응이 좋습니다’라는 식의 설득용으로. 물론 그러다가 회장님용 시안이 최종 선택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회장님용 시안이 온에어 되거나, 처음의 모습도 알아볼 수 없는 너덜너덜해진 시안이 온에어 되면 씁쓸했다. 고생한 만큼 마음에 드는 광고가 나오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여기저기서 욕을 먹고 있는 걸 보면 꽤 속상하다. 일일이 찾아가서 “우리 애가 원래는 안 이랬거든요! 처음엔 엄청 예뻤는데 이렇게 수정하고 저렇게 수정하고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말 한 적도 있다.
인턴 후 바로 정직원으로 근무했던 나는 6개월쯤 일하다 중간에 신입사원 연수를 받으러 갔다. 신입사원 교육이다 보니 전 그룹사에서 다 모였고, 700여 명 정도가 반과 조를 나눠서 수업을 들었다. 나와 같은 조인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계열사였고, 광고 회사는 나뿐이었다. 자연스럽게 각자 회사의 광고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왜 그 제품을 광고하는지 모르겠다’부터 ‘제품명과 카피가 촌스럽다’ ‘왜 그렇게 광고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 한참 나왔다. 최대한 조용히 없는 것처럼 지내다 가는 게 목표여서 ‘아, 그 제품 카피 좀 이상했지, 그 광고 좀 이상했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다가 결국 내가 담당한 광고에서 터지고 말았다.
“그거 처음엔 안 그랬거든요! 그쪽 상무님이 엄청 이상하게 수정해서 그런 거거든요!”
나도 온에어하면서 회사 사람들과 이게 뭐냐며 욕하며 온에어했던 광고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욕하니 순간 욱하고 말았다. 모두의 당황한 눈초리와 함께 황급히 말을 끊었지만, 속에서는 계속 화가 났다. 어떤 고생을 하고 나온 내 광고, 내 새끼인데. 나는 욕해도 남들이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고대행사는 정말 재밌다
심적으로는, 첫 회사를 광고대행사에서 시작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광고대행사에서 일을 시작했기에 재밌게 일을 배울 수 있었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을 해도 별로 힘들지 않은(?)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마케팅 업무는 광고를 베이스로 하기 때문에 광고대행사에서 제대로 기반을 다진 게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비록 연말 연초, 명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쁘고 야근과 주말 출근이 잦으며 이런 일을 왜 해야 하지 하는 일이 가끔 있지만, 그래도 ‘광고 회사니까 이 정도는 돼야지’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재밌는 회사가 광고 회사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했지만 사실 나는 광고대행사를 4년 밖에 다니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조금 더 ‘주도적이고 재밌는 일’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그만뒀다. 막내 AE니까 아직 주도적으로 못한 게 당연한데 그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상사들은 들어주었고, 그만둘 때도 응원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응원은 내 백수 기간에도 이어져 결국 다음 직장까지 소개해 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영화 업계로의 이직, 그와 동시에 전 직장의 광고주로 화려하게 컴백한 이야기는 다음 3화에서 풀어보도록 하겠다.▶ <현직자가 말하는 찐 직무 이야기: 마케팅 편> 시리즈 보러 가기 글ㅣ재완 (https://brunch.co.kr/@karuni)일주일에 110시간씩 일하던 광고대행사를 거쳐, 새벽 6시까지 배우, 감독과 술을 먹어야 했던 영화 투자배급사를 지나, 현재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7개를 담당하며 방송국에서 일한다. 늘 전화에 시달렸던 기억을 살려 에세이 <퇴근 후엔 전화하지마세요> 를 출간했다. 광고, 영화, 방송일을 하고 있지만 보는 것보다 손으로 만들거나 하는 걸 더 좋아한다. 발행일 2023.06.07